"스리랑카 쓰나미 열차 탈선 사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2004년 12월 26일 스리랑카에서 일어난 열차 탈선 사고. 열차는 마타라 익스프레스 소속의 50번 열차로, 콜롬보와 갈 사이를 오가는 열차였다. 사이를 오가면서 주로 스리랑카의 남서쪽 해안가 인근을 지났다. 열차 기관차는 스리랑카 M2, 기관차를 제외하면 8량으로, 승무원 칸 1칸, 1등석 2칸, 2등석 4칸, 그리고 꼬리칸이자 브레이크칸 1개였다. 사고 당시 열차에는 스...) |
잔글 (Jhp4922님이 스리랑카 스나미 열차 탈선 사고 문서를 스리랑카 쓰나미 열차 탈선 사고 문서로 이동했습니다: 스나미 -> 쓰나미) |
(차이 없음)
|
2023년 8월 24일 (목) 09:10 판
2004년 12월 26일 스리랑카에서 일어난 열차 탈선 사고.
열차는 마타라 익스프레스 소속의 50번 열차로, 콜롬보와 갈 사이를 오가는 열차였다. 사이를 오가면서 주로 스리랑카의 남서쪽 해안가 인근을 지났다. 열차 기관차는 스리랑카 M2, 기관차를 제외하면 8량으로, 승무원 칸 1칸, 1등석 2칸, 2등석 4칸, 그리고 꼬리칸이자 브레이크칸 1개였다.
사고 당시 열차에는 스리랑카의 불교 관련 명절인 포야 운두왑을 위해 탑승한 승객들로 넘쳐났는데, 무려 1500명이 넘는 승객들이 낑겨서 탑승했다. 그 중엔 표 없이 무임승차한 이들도 많았는데, 추정으로는 약 200명이 무임승차했다. 사람이 너무 타서 문이 잘 열리지 않는 지경이었다. 열차는 오전 6시 50분, 콜롬보에서 출발했다. 열차는 해안선을 따라 순서대로 칼루타라, 히카두와, 갈을 거친 뒤 마타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열차가 목적지로 향하던 도중, 스리랑카 기준 오전 6시 58분에 수마트라섬 인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진원지 자체는 열차가 지나던 곳에서 한참 떨어진 바다였고, 이 때문에 스리랑카에서도 큰 문제는 예상 안해 열차를 멈출 기회가 있었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쓰나미였다. 오전 7시 30분 쓰나미가 수마트라 섬을 덮쳤고, 쓰나미는 계속 움직이며 스리랑카로 향했다. 오전 8시 45분이 되자 쓰나미가 동쪽으로는 대만까지 닿았고, 더 나아가 스리랑카의 동해안을 덮쳤다.
쓰나미가 계속해서 오고 있는 가운데, 열차는 9시 18분 쯤 암발랑고다(Ambalangoda)역에 도착, 9시 22분에 텔바타(Telwatta)역에 도착했다. 이후 계속 진행하던 열차는 쓰나미 경고를 받고 페라리야(Peraliya)에서 멈춰섰다. 열차 앞에선 쓰나미 경고를 들은 사람들이 달려 도망갔고, 철도는 점점 바닷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열차는 해안선에서 겨우 200m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몇몇 대피하던 사람들은 겁에 질려 열차에 매달리기도 했지만, 이미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시점에서 쓰나미를 피할 순 없었다. 결국 다가온 쓰나미가 열차를 덮쳤고 2번 칸이 충격으로 앞 뒤칸과 분리되어 4.8m 가량 떨어져나갔다. 열차 안에 점점 물이 차올랐고, 승객들의 목 높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열차 위로 대피했다. 열차가 쓰나미를 막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 주민들은 열차 뒤에 숨었다. 그러나 쓰나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고, 하나 더 오더니 또다시 열차를 덮쳤다. 당시 덮친 쓰나미의 높이는 무려 9m, 열차보다 훨씬 높았다. 열차는 그대로 인근 마을까지 떠내려갔다. 열차 내에 남아있던 승객들은 대피하려 했으나, 쓰나미가 몰고 온 온갖 잔해물들이 문을 가로 막았고, 사람들인 창문을 깨고서야 겨우 탈출했다. 5분 정도 지나고서야 물이 어느정도 빠졌지만, 일어난 결과는 너무나 끔찍했다.
사고로 최소 1700명이 사망했다. 무임승차한 승객이 너무 많아 표를 사고 탑승했던 승객들 중에서만 사망자가 파악됐고, 이보다 더 정확한 사망자 숫자는 아직까지도 집계되지 않았다. 남아시아 대지진 당시 스리랑카 사망자(실종자 포함)가 약 3만5천여명이었으니, 사망자의 약 5%가 이 열차 사고에서 나온 셈이다. 사고는 철도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철도 사고로 기록됐다. 2004년은 스리랑카 철도 50주년이 되는 해였으나 참혹한 사고로 얼룩져버렸다.
열차는 오후 4시경 인근을 정찰하던 군 헬기에 의해 발견됐고, 사고가 일어난데 비해 구조가 늦게 시작됐다. 그래서 피해가 더 커졌다. 사고 피해자 시신 중 900구만 되찾을 수 있었다.
현장에선 사망자들을 위한 불교식 장례식이 있었다.
사고 열차는 2005년부터 사고지역이었던 페라리랴 마을에 지어진 쓰나미 추모관에 사고를 기리는 의미에서 전시됐다.
2014년, 사고 10주기를 맞이해 사고 당시 열차가 복원됐고, 한쪽에 사고를 기리는 벽화가 그려진 채 추모비와 함께 공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