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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가지 논란 : 미담에 대한 반론과 변론 ===
=== 몇 가지 논란 : 미담에 대한 반론과 변론 ===


==== 이설 ====
==== 이설(반론) ====
이러한 하치의 감동적인 미담에 대해 다른 주장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하치의 감동적인 미담에 대해 다른 주장 역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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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하치가 매일매일 시부야역에 온 것은 역전의 포장마차에서 하치에게 종종 주던 야키토리를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실제 시부야 출신의 철도기행작가이자 하치를 실제로 만났던 미야와키 슌조(宮脇俊三)는  하치가 점점 유명해지던 1933년 (쇼와8년) 당시부터 하치가 우에노를 기다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그냥 단순히 역의 포장마차 및 행인들이 던져주는 먹이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이외에 하치가 매일매일 시부야역에 온 것은 역전의 포장마차에서 하치에게 종종 주던 야키토리를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실제 시부야 출신의 철도기행작가이자 하치를 실제로 만났던 미야와키 슌조(宮脇俊三)는  하치가 점점 유명해지던 1933년 (쇼와8년) 당시부터 하치가 우에노를 기다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그냥 단순히 역의 포장마차 및 행인들이 던져주는 먹이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 반론 ====
==== 변론 ====
이러한 이설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이러한 이설에 대한 변론도 있다.


먼저, 하치는 포장마차가 나오지 않는 아침 9시에도 반드시 역으로 이동했다. 실제로 하치는 항상 우에노가 아침에 집을 나가던 오전 9시경에 코바야시의 집을 나와 역으로 향했다고 한다.
먼저, 하치는 포장마차가 나오지 않는 아침 9시에도 반드시 역으로 이동했다. 실제로 하치는 항상 우에노가 아침에 집을 나가던 오전 9시경에 코바야시의 집을 나와 역으로 향했다고 한다.

2024년 5월 17일 (금) 03:34 판

하치(코) (충견)

개요

하치코.png

충견 하치, 충견 하치코 또는 충견 하치 공은 일본의 유명한 충견이다. 품종은 순종 아키타견, 성별은 수컷. (순종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기도 하다.)

주인인 우에노 교수(도쿄대학교 소속)가 죽은 뒤, 우에노 교수를 계속해서 기다리다 죽은 개라는 스토리로 충견으로 유명해졌다.

이름이 하치이고, 뒤에 높여 부르는 존칭 -공(일본어로 -코)가 붙어 일반적으로 하치코 또는 충견 하치코(=충견 하치 공)라고 불린다.

시부야역 앞 하치코 광장에 주인 우에노 교수를 기다리는 동상이 있고, 도쿄대학교 캠퍼스 내에는 우에노 교수와 재회한 모습의 동상이 있다.

특히 시부야역 앞의 동상은 매우 유명한 인기 스폿으로, 매일 동상과 함께 사진을 찍고자 하는 외국인/내국인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다.

도쿄대학의 마스코트인 이치코(ichiko)의 모델이기도 하다.

생애

탄생

하치는 1923년 (다이쇼 12년) 11월 10일, 일본국 아키타현 키타아키타군 니이다무라 (현 오다테시) 오시나이의 사이토 기이치의 자택에서 그 날의 8번째 새끼로 붉은 빛의 털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름이 하치(ハチ,일본어로 8)인 이유는 그것. 성의없다.

품종은 아키타견이였다. 성별은 수컷.

부견의 이름은 오시나이(大子内, 기이치가 사는 자택의 지명에서 따 옴), 모견의 이름은 고마(胡麻, 참깨라는 뜻)였다.

우에노 교수 자택으로의 이동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학)의 농학부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던 우에노 에이사부로(上野英三郎)는 아키타견 품종의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하고 있었는데, 이 때 요마세(世間瀬)라는 지인의 도움 덕분에 기이치와 연락이 닿아 하치를 키울 수 있게 되었다. 거래 가격은 당시 물가로 30엔 이었으며,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은 1924년 (다이쇼 13년) 1월 14일, 아키타에서 도쿄까지 하치코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하치는 일본식 쌀가마니()에 넣어져 오다테역에서 도쿄우에노역까지 이동했다. 당시 이용한 열차는 급행 제702열차(당시 다이어그램 상으로)였으며, 화물칸(화차)에 실려져 20시간을 이동했다고 한다.

이후 하치는 우에노 교수 자택에 도착했다.

우에노 교수 자택에서의 생활

우에노의 자택은 당시 도쿄부(東京府) 토요타마군(豊多摩郡) 시부야마치오아자(渋谷町大字) (현 시부야구) 나카시부야(고)아자(中渋谷) 오무코(大向) 834번지였다.

참고로 당시의 시부야는 현재 도쿄의 부도심 역할을 해내고 있는 시부야구와 달리 도쿄 내에서 상당히 변두리에 속하는 한산한 지역이었다.

하치는 여기서 존(ジョン, John/Jon)과 에스(エス, S) 라고 불리는 두 마리의 개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이 중 존은 포인터 품종(포인터견)으로, 특히 하치를 잘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우에노 교수와 하치.png

위 사진은 하치와 우에노 일가의 모습이다. 하치의 몸집으로 보아 도착하고 꽤 되어 찍은 듯 하다.

이때부터 하치의 우에노 교수 사랑(?)이 시작되었다.

하치는 아침마다 현관 앞이나 문 앞까지 나가서 일하러 나가는 우에노를 배웅해 주었고, 때로는 시부야역까지 송영해(送り迎えする) 주기도 했다. 즉, 가장 가까운 역인 시부야역까지 우에노 교수의 출근길을 따라가거나 / 시부야역까지 나가서 퇴근하고 돌아오는 우에노 교수를 맞아주기도 했다. 이 시부야역까지의 여정에는 때로는 존과 에스도 함께했다고 한다.

우에노 교수의 사망

하치코를 기르기 시작하고 1년 정도가 지난 1925년 (다이쇼 14년) 5월 21일, 주인 우에노 교수는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교수회의 회의 후에 갑작스럽게 뇌출혈로 인해 쓰러지고 어떻게 할 틈도 없이 급사해 버린다.

우에노 교수 사후

우에노 교수가 죽은 후, 하치코는 그의 죽음을 알았는지, 아니면 단순히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걱정했는지 첫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25일에는 우에노의 츠야(통야;通夜;불교에서 장례 전에 실시하는 의식)가 열렸다. 이 날에도 하치는 존, 에스와 함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우에노 교수를 맞이하러 시부야역까지 나갔다고 한다.

그 후, 하치는 우에노의 아내인 야에(八重)의 친척이 운영하는 니혼바시덴마쵸(日本橋伝馬町, 현 도쿄도 주오구 부근)의 고후쿠야(呉服屋, 기모노 및 기모노 옷감을 파는 가게를 의미)에 맡겨지게 된다. 그런데 사람을 잘 따르는 하치의 성격상 가게에 손님이 오면 쉽게 달려나와 손님에게 달라붙어서 애교를 부렸기 때문에 (물론 이러한 상황을 좋아하는 손님도 있겠지만, 개를 싫어하거나 이러한 상황을 불쾌해하는 손님도 있었기에) 가게 장사에 방해가 된다 판단되어서 아사쿠사(浅草)의 타카하시 센키치(高橋千吉)라는 사람의 집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때도 하치의 우에노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는지, 산책 중에 도망쳐 시부야를 향해 달려가 버려서 주인을 당황하게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에다가 타카하시의 이웃이 보이면 역시 달려가서 달라붙는 등 이웃과의 트러블도 생겨서, 결국 하치는 다시 우에노 교수의 집으로 보내지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하치를 키울 여력이 없었던 우에노 교수 사후의 우에노 일가는, 결국 고민 끝에 우에노 사후 2년이 지난 1927년 (쇼와 2년)의 가을에 하치를 새 주인에게 주게 된다. 하치의 새 주인은 우에노 자택을 자주 드나들면서 일을 하기도 했던 식목 장인 (植木職人, 현대로 치면 조경사, 정원사, 조경공 정도의 느낌.) 코바야시 키쿠사부로 (小林菊三郎)였다. 그는 이전 우에노 자택에서 일을 할 때부터 하치를 좋아하고 귀여워 해 주었다고 한다. 그의 자택은 시부야마치오아자의 옆, 토요타마군(豊多摩郡) 요요하타마치오아자(代々幡町大字) 요요기(고)아자(代々木字) 토미가야(富ケ谷)에 있었다. (우에노 교수의 자택을 현재의 시부야역 일대로, 코바야시의 자택을 요요기역 일대로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이 정도의 거리라고 보면 된다.)

다시 시부야역과 가까워져서인지, 이 무렵부터 하치는 시부야역 앞에서, 특히 우에노 교수의 귀가 시간 즈음하여 자주 목격되게 되었다.

하치는 코바야시에게도 사랑을 듬뿍 받으며 애지중지 소중하게 키워지고 있었다. (한때는 뒤에 자세히 기술할 동상 제작을 위해 코바야시와 함께 매일매일 안도의 아틀리에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치는 시부야역을 방문해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식사 시간, 잠자는 시간(밤) 정도에만 코바야시의 집으로 찾아가 밥을 먹거나 잠을 자고, 다시 시부야 역으로 향하는 일을 반복했다. 다만 하치가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시부야역에서 자면 쫓겨났기에 시부야역에서 잘 수 는 없었다. 하치가 시부야 역과 집을 오갈 때는, 대부분의 경우 우에노 자택에 반드시 들려서,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다 갔다고 한다. 우에노 교수가 돌아와서 집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듯.

하치는 전형적인 아키타견으로, 붉은빛의 털이 섞인 흰 색의 개였지만, 매일 이러한 생활을 했기에 더러워져 버렸다. 그래서 떠돌이개로 오인받아 몇 번이나 떠돌이개로 잡히기도 했다.

하치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거의 없던데다가 도망치는 것도 느렸기에 쉽게 잡혔다고 한다.

'충견' 하치 공의 탄생

Image하치와 시부야역.png

위 사진은 시부야역에서 옛 주인을 기다리던 때의 하치. 하치가 유명해진 1933년 (쇼와 8년) 무렵으로, 사진 속 남자는 역장이라고 한다.

시부야역에서 매일 옛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하치는, 행인이나 시부야역 근처의 노점상인으로부터 종종 학대를 받기도 했고, 아이들의 괴롭힘을 받기도 했다.

한편, 옛 주인을 시부야역에서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하치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점점 퍼져 나가서, 일본견 보존회 초대 회장인 사이토 히로키치(斎藤弘吉)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하치에 대해 알아보다 하치가 괴롭힘당하는 것을 불쌍히 여긴 그는 1932년 (쇼와 7년)에 도쿄 아사히신문에 "가여운 노견 이야기 (いとしや老犬物語)"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 1933년 (쇼와 8년)에도 하치는 또 다시 한 번 신문에 보도되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치는 상당히 유명인사이자 인기있는 개가 되었고, 옛 주인을 기다리는 충성심에 감동받은 사람들은 이때부터 하치를 존칭을 붙여서 "하치 공" 이라고 부르게 된다.

하치가 유명해진 이후, 시부야역 앞에 있는 하치에게 여러 음식을 주는 사람도 많이 나타났고, 하치를 보기 위해 시부야역에 오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 인기로 인해 시부야역 측에서는 하치가 역에서 잠자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또한 이때즈음부터 하치는 수의사들에게 봉사 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다양한 예방주사 등등 역시 맞았을 것으로 보인다.

수의사들은 또한 하치의 지병인 개사상충(필라리아)에 대해 알고 있어 이 역시 치료하기 위해 앞다리의 털을 깎아서 주사(치료재. 참고로 당시 필라리아 예방재는 없었다고 한다.)를 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러던 중 하치는 어느 때부터인가 귀 한쪽(왼쪽 귀)이 늘어져 접힌 모습이 되었는데(문서 맨 위의 사진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여러 설이 있지만(접힌 귀가 선천적인 것이라 보고, 하치가 순종 아키타견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일단 태어났을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떠돌이 생활 중 떠돌이개에게 귀 부분을 물린 것에 대한 후유증으로, 봉사 치료를 해 주는 수의사들이 있었지만 상처를 제때 꿰메는 응급처치를 하지 못해 접히게 되었다는 설이다.

1933년 (쇼와 8년)의 11월에는, 하치의 유명세가 커져 하치는 세계적 애견 단체인 포치 클럽으로부터 표창도 수여 받는다.

이 무렵 하치를 정면에서 촬영한 사진 (문서의 맨 위의 사진으로 추정.)을 우에노 자택의 이웃에 살던 여성이 현대까지 보존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2017년에 시라네기념시부야구향토박물관・문학관에 기증하였다. 이는 2019년 2~3월에 개최된 신 수장 자료전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1934년 (쇼와 9년)에는 하치가 "알프스 대장(あるぷす大将)"(감독 : 야마모토 카지로)이라는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도쿄에 와서 시부야 역 앞에서 하치코(=하치)를 만나고 그 동상을 구경하는(하치의 구 동상은 1934년 (쇼와 9년) 4월 21일에 설치되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후술) 장면이 나온다. 하치가 영상물로 남은 귀중한 자료.

일본에 수년을 머물렀던 동프로이센 출신의 표현주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Bruno Julius Florian Taut)의 일기에도 이 때의 하치가 등장한다. 1934년 10월 31일의 일기에서 등장하며, 사람들이 하치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간다는 기록과 함께, 하치의 옆에 있는 하치의 동상(후술)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타우트는 이때 하치의 사진 역시 찍었다고 한다.

하치의 죽음

우에노가 사망하고 10년 가까이 흐른 1935년 (쇼와 10년) 3월 8일 오전 6시 즈음, 하치는 시부야 강에 놓인 이나리바시(稲荷橋) 부근, 타키자와(滝沢) 주점의 북쪽에 있는 골목길의 입구 부근(현재 시부야 스트림의 주차장 입구 부근)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만 11세였다. 이곳은 평소 하치가 잘 가지 않는 쪽이었다고 한다.

하치 사망.png

위 사진은 1935년 3월 8일 하치가 발견된 후에 시부야역의 창고로 옮겨져서 촬영된 모습이다.

앞줄의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우에노 교수의 아내이며, 뒷줄의 사람들은 평소 하치코를 돌보던 역무원들. 이 사진은 다음날의 야마토 신문에 실리게 된다.

하치가 죽은 후, 시부야역에서는 12일에 하치의 고별식(동일본 지역의 풍습으로, 장례식 대신 또는 장례식 후에 죽은 대상에게 인사를 건내고 참가자들간에 인사를 나누는 식의 행사이다.) 이 행해졌다. 이 고별식에는 우에노 교수의 아내, 코바야시와 그의 아내, 그리고 역장 및 역 직원과 동네의 사람들, 하치를 좋아하던 사람들 등등 다수가 참석해 하치에게 작별을 건냈다.

또한 시부야의 미야마스자에 있던 사찰 묘유지(妙祐寺)의 스님 등 16명에 의한 독경(불교 경전 독창)이 행해지는 등 거의 사람의 장례식과 비슷한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이 때 화환 25개, 생화 200송이, 수많은 편지나 전보가 전달되었고, 심지어는 180,200엔(당시)이 넘는 부의금까지 모였다고 한다.

우에노 교수가 묻힌 아오야마 영원 (묘지)의, 우에노 교수 묘소 옆에 그를 기리는 사당이 만들어졌다. 대나무 재질의 울타리로 둘러쌓인 묘역 안에는 도교제국대학교수농학박사 우에노 에이사부로묘 라고 세겨진 묘석이 있으며, 이 오른쪽에 있는 작은 사당이 바로 하치의 사당이다.

Image2007.png

우에노의 묘소. 울타리 안에 사당이 보인다. 2007년 촬영.

하치코 사당.png

2019년 3월 21일에 촬영된 충견 하치코의 사당.

다만 하치가 저기에 묻혀 있는 것은 아닌데, 하치의 시체 중 가죽은 사카모토 키이치(坂本喜一)와 그의 내제자(숙식을 함께하면서 가르치는 제자) 혼다 신(本田晋)에 의해 박제로 되어졌다(상세 내용은 후술). 현재는 도쿄 우에노의 국립과학박물관에 박제로서 소장되어 있으며, 미디어에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시체 중 유골은 순종 아키타견 골격 표본으로 만들어졌는데, 1945년 5월 25일 도쿄 대공습에 의해서 소실되게 되었다.

사인에 대한 논의

하치의 시체가 발견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시체에 대한 부검이 우에노 교수가 근무하던 도쿄제국대학의 농학부 소관으로 행해졌다.

해부 결과, 하치의 심장에는 다량의 개사상충(필라리아의 일종)이 기생 중이었으며, 그에 따라서 복수(병, 바이러스 등으로 인해 복강(복부장기를 둘러싸는 복막 내부의 공간) 내에 비정상적으로 저장되는 체액. 주로 혈액 중 일부 성분이 빠져나오는 식이다.)가 저장되어 있었다. 또한, 위 안에서는 사람들이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야키토리의 것으로 추정되는 꼬치가 3~4개 정도 발견되어 있었다. (위벽에 박힌 상태는 아니였다고 한다.) 야키토리 또는 기타 꼬치류 음식을 먹으면서 그대로 같이 삼킨 모양이다.

이에 따라 필라리아를 중심으로 사인이 논의되었다. (참고로, 당시에는 필라리아 예방약이 만들어지기 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2010년대에 들어서 주요 사인이 바뀌게 된다.

당시 해부 후 내부 장기들은 포르말린에 담그어 저장, 보존처리되었고, 앞서 말했듯 가죽과 피부는 박제로, 그리고 뼈는 골격 표본으로 만들어졌다. 이 때 이 포르말린에 담그어진 내장 기관들에 대해, 포르말린 액을 교환할 때마다 잘 관찰해 보면 종양과 같은 것들이 보인다는 말이 이때부터도 나오고 있었다. 이후 2010년 (헤이세이 22년)에 조직 표본을 채취하여 정밀 검사를 실시했는데, 결과적으로 심장부에 중증의 침윤성 암(침윤암; 악성종양이 번지어서 침입해온 암)과 폐에 전이성 암(전이암; 악성종양이 전이(침윤과 달리 혈관 등으로 침윤된 후 먼 거리를 이동)되어 온 암)이 확인되었다. 이 결과는 2011년에 발표되었다.

이로 인해, 개사상충은 결정적 원인까지는 아니고, 이 암이 결정적 원인인 것으로 다시 결론이 내려졌다.

하치의 내부 장기 표본들은 현재 도쿄대학교 농학 자료관 (야요이 캠퍼스 소재)에 전시되어 있다.

필라리아의 기생 모습 역시 보존 처리된 상태로 관찰 가능하다고 한다.

박제 제작

앞서 말했듯, 부검 이후 하치의 시체는 도쿄 과학 박물관 (현 국립 과학 박물관) 에 3월 10일에 전달되어 사카모토 키이치(坂本喜一)와 그의 내제자(숙식을 함께하면서 가르치는 제자) 혼다 신(本田晋)에 의해 박제로 되어졌다.

하치 박제 제작.png

박제를 제작 중인 모습이다.

사카모토 키이치는 일본 박제 제작의 원조라 불리는 사카모토 후쿠지(坂本福治)의 아들로, 사카모토식 박제법이라 불리우는 방법을 고안해 낸,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박제 분야의 권위자였다.

다만 하치의 박제 제작 의뢰가 온 당시에는 사카모토 키이치는 고령이었기에, 주요 작업과 제작은 그의 내제자 혼다 신이 담당했다고 한다.

사이토 히로키치(앞서 나온 일본견 보존회 초대 회장)는 자신의 저서 일본과 개와 늑대(日本の犬と狼)에서 관련 이야기를 한다. 사카모토와 혼다는 박제실 내에 박제품이 완성될 때까지는 다른 사람의 출입을 엄금했지만, 자신만은 특별히 종종 입실했다고 적고 있다.

Image하치박제.png

하치의 박제. 현재도 국립 과학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제작 과정

처음 전해진 하치의 사체는 더러운 상태에다 부패도 진행 중, 냄새도 심했다. 그래서 먼저 시간을 들여서 섬세한 세정을 행했다.

앞서 말했든 하치는 지병인 필라리아 치료재를 생전에 주사로 투여받고 있는 중이었고, 이로 인해 앞다리의 털이 깎인 상태였다. 또한 치료재가 재대로 들어가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지, 피부의 절개를 실시하자 피하에 모여 있던 주사액이 흘러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앞다리의 털이 깎인 부는 다른 곳에서 털을 이식하여 박제를 제작했다.

늘어진 왼쪽 귀의 경우, 안쪽의 연골부의 관절부분이 물어뜯겨져 있었다.

제작은 사카모토식 박제법이라 불리우는, 석고로 정밀하게 상을 제작하고, 그 위에 가죽을 씌우는 방법으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뼈나 "딱딱한 부분" 은 손톱과 지골(손발을 이루는 골격의 일부)만 남았다. 앞서 말했듯 주골격은 표본으로 되었다.

동년, 즉 1935년 6월 13일에 박제가 완성되었고, 2일 후인 15일에 도쿄 과학 박물관에서 개안식(박제의 눈을 여는(뜨게 만드는) 행사)이 거행 후 일반에 공개되었다.

혼다 신의 86세 때의 회상에 따르면, 그 역시 하치의 박제를 만드는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는지 하치 박제본의 몸통에다가 "언제 죽고, 언제 만들어지고, 누가 만들었는지"를 적어 그 봉투를 몰래 넣었다고 한다. 수 만 점이나 박제를 만들었지만, 그런 일을 한 것은 하치의 박제 때 뿐이라고.

박제 전시

지금도 국립과학박물관 우에노 본관의 일본관 2층 북측 윙에 전시되어 있다. 2019년 5월에는 하치의 고향, 오다테시의 관광 교류 시설인 "아키타견의 마을" 개관식을 위해 잠시 대출되기도 했다.

동상

첫 번째 동상

최초의 신문 보도에 의해 하치가 널리 알려진 1932년 다음 해인 1933년 무렵에, 하치의 미담에 감동한, 제전(제국 미술 전람회, 1919~1934까지 15회에 걸쳐서 당시 일본제국의 제국미술원이 주관 개최한 전람회. 미술 작품 공모전의 성격이다.)의 조각(부문)의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조소가인 안도 테루(安藤照)가 마침 지인이던 사이토 히로키치에게 가서 하치의 동상을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전한다. 그 결과 일본견 보존회에서 하치의 상 제작을 안도에게 공식 의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7년 (쇼와 2년)부터 당시 주인이던 코바야시 키쿠사부로는 매일 하치를 대리고 하츠다이(역시 시부야 인근이다.)에 있는 안도의 아틀리에까지 다녔다.

원래 동상은 동물의 경우 특히 동물 사망 후 만들어지거나 하는 일이 많다. 하치의 동상 역시 원래는 그럴 계획이었는데, 동상을 제작해 가던 중에, 갑자기 어느 한 노인이 우에노가에서 하치를 자신에게 맡겼다고 자칭하는 노인이 나타나서 하치가 나에게 맡겨진 만큼 내가 오우치 세이호(大内青圃, 일본의 유명 조각가)에게 목상 제작을 의뢰하려 한다면서 그 자금을 모으겠다며 그림 엽서를 팔기 시작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기꾼 노인을 저지하고 오해를 풀기 위해서 안도는 결국 동상의 제작을 서두르게 되었고, 하치가 죽기도 전에 동상이 세워지게 되었다.

동상 제작 중이던 1934년 1월에는 "충견 하치공 동상 건설 취의서(忠犬ハチ公銅像建設趣意書)"가 작성, 동상 건설의 공식적인 모금이 개시되었다. 일본견 보존회가 발기한 이 자금 모으기에는 철도성 또한 후원했다고.

같은 해 3월 10일에는 오후 5시부터 메이지 신궁 외원의 일본 청년관에서 사이토 히로키치가 하치를 대리고 와 "동상 건설 기금 모집의 저녁(銅像建設基金募集の夕)"을 개최했다. 여기에는 우에노 교수의 아내도 참석했고, 하치를 보고 후원하기 위해 약 3000명이 모였다.

결국 같은 해 4월 21일에는 드디어 시부야역의 정면부에 충견 하치공 상(忠犬ハチ公像)이 설치되고 동상의 제막식이 성대히 행해졌다. 이 제막식에는 하치 자신과 우에노 교수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손녀와 일본 문부성 및 철도성의 장교들, 그리고 하치의 팬들 등 약 300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하치는 위에서 서술했듯 바로 다음해인 1935년 3월 8일에 생을 마감한다.

생을 마감하고 이루어진 고별식을 전후하여 이 동상을 중심으로 화환, 생화 등등이 놓이게 되었다.

Imageㄱㅇ일.png

하치 사망 후 일주기인 1936년 3월 8일에 이루어진 기념식의 모습. 이 사진에서 첫 번째 동상을 확인 가능하다.

동상의 융해

이렇게 동상이 세워졌지만, 이후 중일 전쟁부터 태평양 전쟁까지, 이따른 전쟁으로 인해 금속의 부족이 심각해지게 되었고, 1941년 (쇼와 16년) 결국 금속류 회수령이 시행된다. 금속제인 하치의 동상 역시 이를 피해갈 수 는 없었고, 하치의 동상이 공출되는 것이 결정되어 도쿄 철도국으로부터 통보되어진다.

사이토 히로키치는 이를 알고 강하게 반발, 항의 운동까지 일으켰다.

그는 안도가 제작한 이 동상의 예술성에 대해 호소하기도 했고, 자신이 사비로 동상에 쓰인 것과 같은 양의 구리를 구해다 바치겠다고까지 하는 등 동상이 융해되는것을 강력히 반발했고, 하치가 유명한 만큼 지지층 역시 있었다.

그러나 일본내 다른 유명 동상과 사찰의 유명한 종들, 그리고 서민이 가진 금속 생활품까지도 공출되어 사용되어지는 상황에서, 어디 구석진 창고 안이나 골목길 사이도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시부야역 앞에 떡하니 눈에 띄게 버티고 서 있는 하치공 동상을 공출하지 않는다는것은 일단 엄청난 반발 또한 있었기 때문에, 1944년 (쇼와 19년) 10월에 일단은 "철거"하되 바로 융해하지는 않고 가급적이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최소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다른 곳에 보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서 10월 12일에 "출진식"이 행해져서 일본 국기가 세겨진 띄(어깨띄;たすき)를 거는 등의 행사가 진행되었고, 하치코의 동상은 어디론가 옮겨져 갔다.

앞서 말했듯 가급적이면 최대한 녹이지 않고 보관만 하기로 했었지만, 원폭 두 발 까지 투하되어 히로시마나가사키가 쑥대밭이 되어 버리는 등 결국 점점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천황포츠담 선언의 수락과 일본의 종전 선언을 일본 제국 내 전 국민에게 전하게 되는 교쿠온 방송 (玉音放送;옥음방송) 바로 전날인 1945년 (쇼와 20년) 8월 14일에 철도성 하마마츠 공장에서 융해되어 버리고 만다.

바로 다음 날 종전 선언이 발표되었으나, 이미 녹인 동상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동상은 결국 기관차의 부품으로 되어 도카이도선상을 달리게 된다.

참고로 이 1차 동상에 대해서, 2006년 6월 13일에 테레비 도쿄의 프로그램 개운! 뭐든지 감정단(開運! なんでも鑑定団)에 (한국으로 따지면 진품명품 정도) 한 일반인 출연자가 어떻게 구했는지 충견 하치공 동상의 받침대 부분에 사용되었던 명판을 출품했다! 이는 감정사에 의해 진품으로 확인되었다.

황족에게 바쳐진 하치 와(누워있는)상

하치 동상을 제작한 안도는, 1934년에 고쥰황후(香淳皇后) (당시에는 나가코 왕녀 (良子女王))가 하치 공의 이야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는 것을 듣게 된다. 그래서 황족에게도 하치를 주제로 한 동상을 만들어서 헌상하기로 했고, 시부야역의 개찰 앞에서 자면서 우에노를 기다리는 하치의 모습을 모티브로 한 동상, 즉 누워있는 하치의 동상 (=와상)을 시부야역 앞에 세워질 동상과 동시에 제작했다. 이 와상은 1934년 4월 21일 시부야역 앞에 동상이 세워지고 나서 동년 5월 10일에, 사이토 히로키치가 집필한 하치사적개요(ハチ事跡概要)와 함께 쇼와 천황과 황후, 황태후에게 진상되어졌다.

안도는 스스로 이 와상의 복제본을 만들어 두어서 소지하고 있었는데, 안도가 1945년 5월에 미군에 의한 도쿄 대공습에서 사망하면서 복제본의 행방도 묘연해졌다.

그러나 그 후 안도의 아들이자 역시 조각가인 안도 타케시(安藤士)가 다리부가 부서진 상태의 이 복제품을 죽은 안도의 작업실 터에서 찾아내었고, 2010년에도 이를 보관하고 있다는 근황이 나왔다.

안도 타케시는 2019년 1월 13일에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황실에 진상된 와상은 근황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잘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동상 - 현재의 하치 동상

안도의 첫 번째 동상은 기관차가 되어 버렸고 안도 역시 도쿄 대공습으로 사망했지만, 이후 그의 아들 안도 타케시의 주도 아래에 종전 이후 3년 만인 1948년 (쇼와 23년) 8월에 재건되었다.

당시 일본은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었지만, 하치의 이야기는 전쟁 전부터 이미 구미에 소개되고 있었기에,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에 소속되어 있던 애견가였던 유시(有志)가 유형, 무형의 지원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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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두 번째 하치 동상. (1954년 촬영)

실제 동상의 제막식이 8월 15일에 열렸는데, 여기에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에서도 대표자가 참석했다고 한다.

전후에는 여전히 물자가 부족했기에, 안도는 아버지의 작품 중 "대공에(大空に)"를 녹여서 이를 통해 새로운 하치 동상을 만들어야 했다.

재건 시에는 명칭이 문제가 되었는데, 원래와 같이 충견 하치공 상으로 하게 된다면 "충견" 이라는 말이 군국주의를 연상시키므로 "애견"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만 결국은 충견이라는 네이밍을 그대로 가져가게 되었다.

재건 직후인 1948년 8월 30일에는 헬렌 켈러가 일본에 방문하여 하치 공 동상을 구경하기도 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하치의 이야기도 점점 잊혀져 갔고, 1960년대가 들어서는 시부야역 앞에 랜드마크로서 자리하는 하치공 동상의 지명도는 높았으나 그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서 도큐그룹(시부야역 근처에 도큐백화점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 중이다.)이 영화 등을 통해 시부야역의 랜드마크로서 하치를 밀어주기 시작, 다시금 역사가 조명받기 시작했다.

1984년 4월 8일에는 동상 건립 50주년이 되었다. 이 때는 특별 이벤트로서 도쿄 대학 농학부 농학 자료관에 전시되고 있던 우에노의 흉상이 시부야역까지 운반되어져서 동상끼리라도 재회를 하게 되었다.

동상이 있는 광장으로 이어지는 시부야역의 출구 공식 명칭은 하치코(공) 구치(출입구) (ハチ公口)로서, 도쿄를 넘어서 일본을 상징하는 스팟 중 하나인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와 건물군이 있는, 도쿄 최대의 번화가 중 한 곳으로 이어진다. 하치 동상은 이러한 번화가에 있으면서 만남의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인증샷 장소로도 유명하여 줄을 길게 늘어선 외/내국인 관광객들 역시 볼 수 있다.

사실 현재의 위치가 원래 위치가 아닌데, 원래는 광장의 중앙에 있었지만 이후 광장을 정비하고 지하 출입구, 분수 광장(현재는 없어짐), 정차 에리어(현재는 없어짐) 등을 만들기 위해 광장을 공사할 때마다 광장 내에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고 있다. 이러면서 동상 아래의 받침대 역시 높이나 형태 등이 이리저리 바뀌고 있다.)

이후 1989년 (헤이세이 원년) 5월에 역전 광장 확장 공사와 함께 마지막으로 4회째 이동을 했으며, 이 때 북쪽을 바라보던 동상을 동향으로 수정, 하치가 역 출구를 바라보는 형태로 되어졌고 받침대 역시 낮아져서 상에 닿기 쉬운 형태가 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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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충견 하치 공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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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각도에서. 말년의 모습을 모델로 하였기에, 한쪽 귀가 누워 있다.

두 번째 동상의 프로토타입의 발견

야마가타현의 후지시마마치 동사무소(2005년부터는 츠루오카시 관공서 후지시마 청사)에는 이전부터 정체 불명인 채 보관되고 있던 석고 개 동상이 있었다. 이는 2006년 (헤이세이 18년) 현지의 약제사인 타카미야 히로시(高宮宏)에 의해 시부야역 앞에 재건된 두 번째 동상의 시제품, 즉 프로토타입인 것이 밝혀졌다!

이는 1947년 (쇼와 22년)에 안도 타케시가 제작한 것이었다.

이후 두 번째 동상이 무사히 완성되고 나서는 보관되다가 안도가 작업장으로 쓰던 건물을 가구들과 같이 여배우 산죠 미키(三條美紀)가 구매한 것이 계기로 되어, 그녀의 아버지이자 후지시마마치 출신의 사토 엔지(佐藤円治, 전 배우이자 영화 제작사 임원)의 손에 프로토타입이 넘어갔다.

그 후 여러 소유자를 거쳐오다가 최종적으로 1985년 (쇼와 60년)부터 후지시마마치 동사무소의 신청사가 완공된 기념으로 건설 회사로부터 기증되어서 보관되고 있던 것이었다.

이 사실이 판명된 후, 츠루오카시 관공서 후지시마 청사는 이 동상을 일반에 전시하고 있다.

2012년 6월 24일부터는 JR 츠루오카역 구내에, 히나마츠리 인형 전시 시기를 제외하고, 즉 4/15 부터 다음해 2/15 까지 공개되고 있다.

기막힌 우연으로 이 프로토타입이 발견된 츠루오카시는 하치코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데에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사이토 히로키치의 고향이기도 하기에, 이 일을 계기로 관련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2006년 11월 3일에는 쓰루오카 하치공 동상 보존회 (鶴岡ハチ公像保存会) 가 설립, 하치공 석고상(프로토타입 상)의 보존 및 홍보 그리고 사이토 히로키치의 위업을 알리고, 하치의 형제견들에 대해서도 조사를 실시하는 것을 주 활동 내용으로 하고 있다. 초대 회장은 프로토타입 동상을 발견한 타카미야 히로시가 취임했다. 참고로 초대 부회장은 카츠키 마사토 (勝木正人), 초대 사무국장은 쿠로바네 요지(黒羽根洋司).

기타 동상

오다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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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의 고향에 있는 철도역이자 하치가 우에노 교수의 집으로 가기 위해 열차를 탔던 오다테역의 역 구내에 하치공을 기리는 신사가 있으며, 역사 외부에는 시부야역에 있는 것과 동일한 하치코 동상도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이 동상 역시 한 번 융해되었다가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히사이역

미에현 츠시는 우에노 교수의 고향으로, 이에 따라 이곳에도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의 동상은 우에노와 하치가 함께 있는 동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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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우에노와 하치가 만나 함께 있는 상"의 제작을 목적으로 하여 모금활동도 벌였고, 2012년 10월에 츠시의 히사이역 동쪽 출구에 동상이 만들어져 10월 20일에 제막식이 집행되었다.

도쿄대학교 야요이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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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헤이세이 27년) 3월 8일, 하치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우에노 교수의 직장이던 도쿄대학교 야요이 캠퍼스의 농학부 캠퍼스 부근에, 우에노와 하치가 만난 모습의 동상이 만들어졌다.

도쿄대학교의 본 캠퍼스이자 도쿄대의 상징인 야스다 강당이나 아카몬이 있는 혼고 캠퍼스 바로 옆의 캠퍼스로, "도버 해협 대교"로도 불리우는 연락교를 사용해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참고 : 아키타현 오다테시의 활동

생후 얼마 안 되어 아키타현을 떠나 도쿄로 전달된 하치지만, 어찌되었든 하치의 고향은 오다테시이기에, 이 점을 살려 오다테시는 하치와 관련된 여러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 시작점은 하치가 죽고 4개월여가 지난 1935년 7월 8일, 시부야역의 하치코상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동상이 오다테역 앞에 설치된 것이다. 이 동상은 시부야의 것과는 달리, 두 귀가 모두 서 있는 형태이다.

역시 전시의 금속 공출로 인해 융해되어 버렸지만, 1987년 (쇼와 62년) 11월 14일에 재건되었다.

또한 1989년 (헤이세이 원년) 봄에는 JR 하치공 신사(JRハチ公神社)로 칭해지는 신사가 만들어져서, 발포 스티롤제의 전장, 전고가 모두 약 2m에 달하는 대형 하치공 상이 설치되었다.

이는 오다테 상공회의소가 영화 하치공 이야기(ハチ公物語)(1987년작)을 기념해서 주도한 것이였다.

이 대형 하치 공 상은 2009년 (헤이세이 21년) 10월 14일, 높이 85cm, 폭 40cm, 너비 90cm에 달하는 무게 30kg에 청동제의 (단, 일부 부분은 토와다석(十和田石)) 새로운 청동상으로 대체되면서 신사 역시 새단장되었다.

이 청동상은 2019년 5월 8일 개관한 관광교류시설 "아키타견의 마을"로 이전해 가게 되었다. 이 시설의 외관은 하치가 우에노 교수를 기다린 그 당시 시부야역의 외관을 그대로 가져왔다.

2003년 10월 12일에는 하치 탄생 80주년 기념으로 하치의 생가 앞에 비석도 설치했다.

2004년 10월에는 시내의 아키타견 회관 건물 앞에 또 다른 하치 동상인 "망향(望郷)의 하치 공 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오다테시의 오다테쥬카이 돔 구조물은, 2017년 4월부로 명명권을 구매한 기업 니프로에 의해서 니프로 하치공 돔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오다테시 역시 하치코의 고향으로서 관련 마케팅과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참고 : 사이토 히로키치의 하치코에 대한 술회

사이토 히로키치는 하치 공의 일화를 신문에 싣게 된 계기 등에 대해 그의 저서 일본의 개와 늑대(1964)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ハチは)困ることにはおとなしいものだから、良い首輪や新しい胴輪をさせると直ぐ人間に盗みとられる。(中略)また駅の小荷物室に入り込んで駅員にひっぱたかれたり、顔に墨くろぐろといたずら書きされたり、またある時は駅員の室からハチが墨で眼鏡を書かれ八の字髯をつけられて悠々と出て来たのに対面し、私も失笑したことを覚えている。夜になると露店の親父に客の邪魔と追われたり、まるで喪家の犬のあわれな感じであった」

「なんとかハチの悲しい事情を人々に知らせてもっといたわって貰いたいものと考え、朝日新聞に寄稿したところ、その記事が大きく取り扱われ、昭和七年十月四日付朝刊に『いとしや老犬物語、今は世になき主人の帰りを待ちかねる七年間』という見出しにハチの写真入りで報道され、一躍有名になってしまった。(中略)朝日の写真班員の来駅で駅長がびっくりしてしまい、東横線駅ともども駅員や売店の人々まで急にみな可愛がるようになってしまった」

((하치는) 곤란하게도 온순한 성격이라서, 좋은 목걸이나 새로운 목줄을 주면 바로 인간에게 도둑맞는다. (중략) 또 역의 소화물실에 들어가서 역무원에게 치이거나, 얼굴에 먹칠하는 장난을 당하거나, 또 어떤 때는 역무원의 방에서 하치가 먹물로 그려진 안경을 쓰고 팔자 수염을 붙여서 유유히 나오는 것을 대면해서 나도 실소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밤이 되면 노점상 주인에게 손님을 방해한다고 하여 쫓겨나거나 하는 등 마치 초상을 당한 개와 같은 불쌍한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하치의 슬픈 사정을 사람들에게 알려 위로해 주고 싶다고 생각해 아사히 신문에 기고했더니, 그 기사가 크게 취급되어, 쇼와 7년(1932년) 10월 4일자 조간에 "가여운 노견 이야기, 지금은 세상에 없는 주인의 귀가를 학수고대하는 7년간" 이라는 표제에 하치의 사진이 들어가 보도되어 일약 유명해져 버렸다. (중략) 아사히(신문)의 사진반원이 역을 방문해서 역장이 깜짝 놀라 버려, 도요코선(시부야역을 기점으로 하는 철도 노선)(의) (시부야)역(의) 모두가, 역무원이나 매점의 사람들까지도 갑자기 하치를 모두 귀여워하게 되어 버렸다.)

몇 가지 논란 : 미담에 대한 반론과 변론

이설(반론)

이러한 하치의 감동적인 미담에 대해 다른 주장 역시 존재한다.

철학자 타카하시 쇼지(高橋庄治)는 당시 우에노의 이웃에 살고 있었기에 종종 시부야역과 동네에서 하치 역시 목격했는데, 우에노는 대학 교수라는 직업 특성상 통근 시각이 불규칙했고, 하치 역시 딱히 통근이랑은 관계없는 시간대에도 역 근처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를 토대로 이러한 하치의 습관을 모르는 역 직원이나 다른 사람들이 하치를 '충견' 으로 '착각' 했고, 이가 전시중 다용된 충의, 충성이라는 말의 선전을 위해서 이용된 것이 아닐까 주장했다.

이외에 하치가 매일매일 시부야역에 온 것은 역전의 포장마차에서 하치에게 종종 주던 야키토리를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실제 시부야 출신의 철도기행작가이자 하치를 실제로 만났던 미야와키 슌조(宮脇俊三)는 하치가 점점 유명해지던 1933년 (쇼와8년) 당시부터 하치가 우에노를 기다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그냥 단순히 역의 포장마차 및 행인들이 던져주는 먹이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변론

이러한 이설에 대한 변론도 있다.

먼저, 하치는 포장마차가 나오지 않는 아침 9시에도 반드시 역으로 이동했다. 실제로 하치는 항상 우에노가 아침에 집을 나가던 오전 9시경에 코바야시의 집을 나와 역으로 향했다고 한다.

또한, 하치가 행인들이나 포장마차 등의 먹이를 받게 된 것은, 유명해진 삶의 마지막 2년 동안만이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오히려 포장마차 주인이나 역무원들, 행인들에게 놀림, 폭행, 장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치가 먹이를 목적으로 하여 시부야역에 갔다는 것은, 결국 배가 고팠다는 것인데, 코바야시는 하치를 매우 소중이 돌보아 주어서 쇠고기를 식사로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가 고픈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또한 하치가 앉아 있던 곳은 역 앞의 포장 마차 근처가 아닌, 우에노가 항상 나오던 개찰구에 접하는 소화물 창구의 근처였다.

심지어는 하치에게 말을 걸며 코 끝에 빵을 놓는 사람이 있어도, 하치는 그것을 쳐다보면서 누워 있기만 할 뿐, 잘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치의 미담을 최초로 알린 사이토 히로키치는 "유명해지면 누구든 반대파가 나온다" 며 "하치카 시부야역을 떠나지 않은 것은 야키토리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왔다. 개는 야키토리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고 나도 코바야시군도 하치에게 야키토리를 잘 사 주었지만, 그 것 때문에 하치가 역에 머무르게 된 것은 아니다" 라며 이러한 반론에 결사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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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의 하치코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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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城壁)의 하치코는 대한민국의 모바일 게임 라스트오리진의 S급 중장형 보호기 바이오로이드이다. 미뜨파이 드실래오?

컴패니언 시리즈 소속으로, 기본적으로 (+늑대) 수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름은 역시 위의 충견 하치에서 따 온 것으로, -공 을 뜻하는 -코 까지 이름으로 가져온 모습이다. 일본에서는 -코 가 이름에서 일반적으로 子로 쓰이기에 딱히 부자연스러울 것도 없다.

앞에 붙는 성벽은 구 영칭 Hachiko of Castling 에서 보아 (현재 영칭은 그냥 Hachiko 이다.) 방어, 막는다는 의미인 듯 하다. 보호기이므로 적절한 명칭.

신체 나이는 15세로 컴패니언 중에선 가장 어리다.

상세

CS 페로와 마찬가지로 동물 유전자 합성을 통해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이며 경호를 위해 만들어진 컴패니언 시리즈의 일환이다. 기존 캐릭터별 자기소개와 설정에는 정확하게 언급이 없었으나 자매기인 펜리르의 자기소개를 보면 늑대 유전자의 유전자를 혼합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엄연히 경호원인 만큼 일정 이상의 전투력이 필요해서 늑대의 인자도 사용했지만 친화력과 주인을 따르는 성품을 위해 개의 유전자를 섞어넣은 듯하다.

페로와 마찬가지로 기본은 경호원이지만 메이드이기도 해서 가사도 담당할 수 있는 모양이나, 하나같이 묘하게 나사 빠진 구석이 많은 컴패니언 시리즈답게 자기가 만들 줄 아는 건 미트파이 밖에 없고, 만드는 것도 미트파이 밖에 없으며 심지어 뭘 어떻게 만들어도 결국은 미트파이가 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완벽히 기승전미트파이인 수준. 사실 미트파이가 만들기 쉬운 요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요리실력보다는 지식의 문제인 듯. 그래도 소완 등 요리를 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을 통해 가르침을 받으면서 전보다는 요리할 수 있는 음식 가짓수가 늘어난 모양이다. 배울 경우 비프 웰링턴 같은 것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한다.

정신연령은 거의 어린이 수준이다. 때문에 비서 역할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며, 비서의 업무는 페로가 수행하고 하치코는 거의 어린아이 조에 편성되거나 컴패니언 마스코트 정도로 취급받는다. 그래도 성격은 붙임성 있는지 <지고의 저녁 식사> 이벤트에서 묘사된 모습은 매번 주인공의 무릎에 올라앉아 쓰다듬을 받으며, 놀아줄 사람을 찾을 때가 많다.

게임 설정에서는 강한 친화력으로 일종의 판독기 같은 캐릭터인데, 이 캐릭터마저 친해지려 하지 않는다면 그 캐릭터에게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전체적으로 순진한 강아지 같은 면모가 있다. 패치노트에 적힌 바로는 산책은 하루 4시간씩 해야 한다는 듯 한데... 역시 같은 개과(?)이자 오르카를 200바퀴 돌고서도 산책이 부족하다던 켈베로스와도 유사한 부분이다.

순진하고 어린애같은 면모가 있지만 주인에 대한 충성심은 확실해서, 주인이 위험에 처하거나 혹은 위협적이라 판단한 상대에겐 으르렁거리는 모습도 보여준다. 하치코의 충직함을 알 수 있는 예로, 바이오로이드들이 전투에서 대파될시 호감도 하락량이 캐릭터마다 차이가 있는데, 하치코는 베로니카, 펜리르, 이터니티 등과 같은 대파되어도 호감도가 전혀 떨어지지 않는 부류에 속한다.

하치코와 페로는 블랙 리리스를 언니라고 부르지만 페로와 하치코는 급수가 비슷한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른다. 심지어 하치코는 페로를 정말 좋아하는지 자기소개와, 부관대화에서도 페로를 찾는다. 하지만 페로는 도도한 고양이답게 하치코를 겉으로는 귀찮아하는 면모가 좀 있다. 페로와 하치코는 제작 동기부터가 정반대이고 그런만큼 성격도 정반대임을 부각하는 설정이다.

CS 페로와 자신이 친구로 받아들인 일부 이외에는 모두 존댓말로 대한다. 어린이가 어른의 하십시오체를 억지로 흉내내는듯한 귀여운 말투를 사용한다.

복장은 컴패니언 시리즈다운 메이드복. 무장은 탱커다운 거대한 방패와 권총으로 AS-12 스틸 드라코와 유사하며, 모션 등도 상당부분 공유한다. 리볼버 권총은 의외로 유탄을 쏜다. 그런데 게임상에서 실제 음향 효과는 펌프액션 산탄총인데, 스틸 드라코의 것을 그대로 재탕해서 생긴 문제. 승리 모션은 리볼버를 손가락에 걸고 휘두르다가 놓쳐서 머리에 맞고 아파하는 것. 리볼버를 놓쳤을 때 잠시 눈동자가 사라지는데 이 또한 스틸 드라코의 데포르메 캐릭터 동작을 그대로 쓴 부분이다. 드라코는 울먹이지만 하치코는 눈이 그냥 >< 모양으로 변한다.

컴패니언 시리즈가 대부분 인기가 좋기는 하고 스토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하치코는 특히 맹하고 순둥순둥한 모습과 성격에 걸맞는 뛰어난 성우 연기로 인기가 좋다. 스토리에서 비중있게 나오지는 않아도 여기저기 자주 나오는 편. 특히 캐릭터는 확실해서 이벤트 스토리들에서 계속해서 미트 파이와 엮이면서 2차 창작에서는 으로 대폭 활용되었다. 미트파이, 기돈 곤겪기(기동 공격기), 엥- 등등...

하치코 (아티스트)

하치코(hachiko) 산하 음반
구아노의 입시 하모니 으깬 풋콩 정령 - 혁명적 노래집 플랫 신드롬 니트 데이즈

공식 유튜브

하치코(Hachiko)는 대한민국의 뮤직 아티스트이다.

이름은 위의 충견 하치코에서 따 온 것.

주로 suno.ai를 이용한 AI (인공지능) 기반 음악을 제작한다.

활동 플렛폼은 유튜브 하나.

비슷한 이름의 네이버 블로그인 하치코의 아카이브 운영자와 동일인물이라는 의혹이 있으나 아직까지 공식 입장은 내놓은 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