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
개요
東京·埼玉連続幼女誘拐殺人事件(도쿄 사이타마 연속 유아 납치 살인 사건)
공식 명칭 경찰청 광역 중요지정 제117호 사건(警察庁広域重要指定第117号事件), 사건번호 헤이세이 13년 형사상고사건 제1205호 (平成13年(あ)第1205号)
1988년(쇼와 63년) 8월 22일부터 이듬해 1989년(헤이세이 원년) 6월 11일까지 도쿄도 특별구(고토구) 및 북서부 ~ 사이타마현 세이부 이케부쿠로선 연선지역에서 범인 미야자키 츠토무가 일면식도 없던 여아 4명을 잇따라 연속적으로 납치하여 살해한 후 인근 지역에 유기한 사건. 본 문서에서는 미야자키 츠토무에 대해서도 함께 다룬다.
이후 한노시에서 어린 자매를 납치해 성폭행하려다가 자매의 아버지가 현장을 목격하여 결국 범행이 드러나면서 피의자로 체포, 기소된 미야자키 츠토무는 형사재판에서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했으나 1심, 항소심, 상고심을 거쳐 사형을 확정받았다.
피해자
콘노 마리
(今野真理) 1984년생, 향년 4세 |
요시자와 마사미
(吉沢正美) 1981년생, 향년 7세 |
난바 에리카
(難波絵梨香) 1984년생, 향년 4세 |
노모토 아야코
(野本綾子) 1983년생, 향년 5세 |
사건 전개
범행
1988년 8월 22일, 사이타마현 이루마시 이루마 빌리지에 살던 당시 4살 콘노 마리(今野真理)를 도로 위 인도교에서 발견하고 “시원한 곳에 가지 않을래?”라며 말을 걸어 차로 유인 후 도쿄도 하치오지시 이츠카이치쵸(五日市町, 현재 아키루노시) 나구리무라(나구리촌)(名栗村) 도쿄전력 신타마 변전소 인근에 있는 숲으로 납치했다.
마리가 울음을 터트려 당황한 미야자키는 오후 6시 경에 조수석에서 마리를 교살하고 숲에 유기했다. 이후 다음날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빌려 사후경직으로 인해 굳은 사체에 외설행위를 하면서 이를 카메라로 촬영하였다. 이후 시체는 숲에 유기한다.
한편 저녁이 되어도 마리가 귀가하지 않자 마리의 부모는 경찰서에 신고했다. 범인이 몸값을 원하는 납치범일 거라고 생각한 경찰은 마리의 자택 전화기에 역탐지 설치기를 연결하고 기다렸으나 범인에게 전화는 오지 않았다.
첫 번째 사건은 다른 사건들과 다르게 목격자가 많았다. 길 모퉁이에서 마리가 중년 남성을 따라가는 모습을 남자아이 2명이 목격하였고, 같은 단지에 사는 주부도 마리가 남성의 뒤를 따라 걷는 모습을 목격했다. 미야자키 츠토무는 진술에서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일부러 아이와 5m 정도의 일정 거리를 두고 걸었다"고 털어놨다.
1988년 10월 3일, 사이타마현 한노시의 초등학교에서 당시 7살이었던 요시자와 마사미(吉沢正美)가 오후 2시경 친구들과 단체로 하교하여 집 현관에 란도셀을 놓아둔 뒤 외출하던 중 미야자키 츠토무가 “길을 잃은 것 같은데 아저씨와 같이 갈까?”라고 말을 걸어 유괴했다. 미야자키는 마리를 죽인 장소인 이츠카이치쵸 숲에서 오후 5시 경에 마사미를 목을 조른 후, 마사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옷을 벗겨 곧바로 시체에 외설 행위를 하였다. 그러나 마사미는 목을 조르는 살해 행위에도 빈사 상태로 살아있었기에 경련을 일으켰고, 마사미가 경련을 일으키자 공포를 느껴 해당 숲에 있는 코미네 터널(小峰峠)인근에 시체를 버리고 도망쳤다.
해당 2차 사건에 대한 동기에 대한 공술조서에선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스릴이 있었다"고 했다가 1차 감정에서는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1988년 12월 9일 사이타마현 카와고에시 카와고에 그린파크 단지 내에 살던 당시 4살이었던 난바 에리카(難波絵梨香)는 오후 2시 30분경 어머니와 함께 유치원에서 하교 후 100m 떨어진 친구 집에 놀러나갔고 어둑어둑해질 무렵인 오후 4시 30분 또 다른 친구와 밖에 나와 인사한 뒤 귀가하던 중 자택까지 약 20m 가량의 길에서 미야자키와 마주쳤다. 미야자키는 “따뜻한 곳에 가지 않을래?”라는 말로 에리카를 유인하여 차량으로 납치하였다. 이동 중 에리카가 울음을 터뜨리자 차 주변에 난방을 가동하고 "목욕할 시간"이라고 말하며 에리카의 옷을 벗겨 나체 상태로 만든 후 카메라 조명을 켜서 사진을 찍었다.
에리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고의적으로 몸 위에 올라가서 압박하여 오후 7시 경에 살해한 뒤 시체를 유린하며 동영상을 촬영했다. 마리와 미사미를 유기했던 나구리촌(名栗村)의 산림에 시체를 유기하고, 옷가지는 요코세강(横瀬川) 근처에 버렸다. 그러나 에리카의 시신은 살해 6일 만에 경찰에게 발견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시기 미야자키는 여러 괴문서를 제작하여 보내기도 했다. 먼저 1988년 12월 15일에는 신문에서 발견한 “마가 껴있다(魔がいるわ)”라는 글자를 오리고 조합하여 이루마강이라는 글자를 이어붙인 괴엽서를 이루마시에 살던 첫번째 피해자 콘노 마리의 유족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5일이 지난 12월 20일에는 사망한 에리카의 부모의 자택에도 괴문서가 도착했다. 내용은 "에리카, 추위, 기침, 목, 휴식, 죽음(絵梨香 かぜ せき のど 楽 死)"였다. 전문가들이 이 문서를 해독한 결과 문자를 늘어놓고 바꾸어 읽는 아나그램이 사용된 문장으로, 해석해 보면 ERIKA KAZE SEKI NODO RAKU SI→IKIKAE SASE RAREZU KINODOK “살아돌아갈 수 없어서 딱하다(生き返させられず気の毒)” 라는 문장이 만들어졌다.
또한 에리카의 아버지가 “시신이라도 돌아와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뉴스를 본 미야자키는 유족들을 모욕할 작정으로 훼손된 시체를 유족에게 보내려고 계획하기 시작했다. 먼저 마리의 시신을 다시 회수하여 자신의 집 인근 논에서 화장한 뒤, 마리를 화장하고 남은 뼛조각, 치아와 함께 괴문서를 상자에 담아 피해자의 자택 앞으로 발송했다. 인스턴트 카메라도 함께 있었는데, 인스턴트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는 마리의 옷과 샌들이 찍혀 있었다. B5 크기의 문서에는 "마리의 뼈, 불태움, 감정, 증명(真理 遺骨 焼 証明 鑑定)"이라고 적혀 있었다.
마사미의 시체도 훼손하여 부모에게 보내려고 계획했고, 이후 다시 범행 장소로 돌아가 시체를 찾았으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고 도로 옆 도랑에 미야자키의 자동차 바퀴가 빠져 당황해하던 모습을 지나가던 차량이 목격하여 도와주었다. 이 목격자가 번호판의 세 숫자를 정확히 기억한 덕분에 그 증언을 토대로 범인의 차량이 하얀색 해치백의 토요타 코롤라Ⅱ(カローラⅡ)라고 추정되었으나 당시는 밤이어서 시야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미야자키의 차량은 닛산 랭글리였기 때문에 수사의 큰 뒷받침은 주지 못했다. 마사미의 시체를 보내는 것은 경찰에 잡히기 전까지 시체의 위치를 찾지 못했기에 최종적으로는 실패했다.
체포 후 진술에서 미야자키는 유골을 가족에게 보낸 이유를 “仏心(=불심,자비)라고 말했다.
한편 2월 10일, 「이마다 유코」(今田勇子)라는 여성의 이름으로 아사히신문 도쿄 본사에 범행성명문이 날아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범행 성명(犯行声明)
콘노 마리의 집으로 뼈가 들어있는 상자를 보낸 건 바로 저입니다.(今野真理ちゃん宅へ、遺骨入り段ボールを置いたのは、この私です。) 이번 콘노 마리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 혼자 저지른 짓입니다. (この、今野真理ちゃん一件に関しては、最初から最後まで私一人がしたことです。) 제가 이곳에 이렇게 진실을 써내려가는 데는 이유가 있기때문입니다. (私が、ここに、こうして真実を述べるのには、理由があるからです。) 먼저 그 상자에 들어있던 뼈는 명백하게 마리의 뼈입니다. (まず、あの段ボールに入った骨は、明らかに真理ちゃんの骨です。) 그 증거를 대보겠습니다.(その証かしを立てます。) 먼저, 어떻게 해서 아이를 데려갔는지를 말할게요... (まず、どうやって連れ去ったかを述べましょう…) 〈중략〉 그 뼈는 정말로 마리의 뼈랍니다. (あの骨は、本当に真理ちゃんなのです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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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 같은 내용의 괴문서가 콘노 마리의 자택에도 배달되었다. 마리의 장례식이 끝난 당일인 3월 11일에는 아사히신문과 콘노 마리의 자택 양쪽에 2번째 문서가 도착했다.
고백문(告白文)
장례식을 치러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御葬式をあげて下さるとのことで、本当に有難うございました。) 덕분에 제 아이와 함께 드디어 ‘성묘’를 할 수 있게 됐어요. (御陰様で、私の子、共々、やっと「お墓」に葬ってやれることができました。) 〈중략〉 나는 신에게 싸움을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私は、神に斗いを挑まなくてはなりません。) 신에게 “15년은 붙잡히고 싶지 않아”라고 하는 ‘소원’을 빌며 “보고싶은 우리 아이를 저는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필사적으로 지킬 예정입니다. (神に対し、「15年は捕まりたくない」といウ「願い」をぶっつけて、「私の会いたい子供に私は会いたい」という「望み」を死守するつもりでおります。)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는 방법은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人間が、神と斗う術は、それしかありませ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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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여성이 "아이를 유산해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취지의 범행 성명을 보내며 수사에 혼란을 주려고 했다.
1989년 3월 11일에는 위의 첫 번째로 나온 가짜 범행 성명을 마찬가지로 2번째 피해자 마사미의 집에 발송했다.
그러다 같은 해인 1989년 3월 29일에는 옆 동네인 도쿄도 아다치구에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이 밝혀지면서 일본 사회가 충격에 빠졌고, 경찰의 관심도 이쪽으로 옮겨가면서 미야자키 츠토무가 잡힐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한편 미야자키 츠토무도 이 사건이 알려지고 나서 2개월 간 잠적했다.
그러다 2개월여가 지난 1989년 6월 6일, 도쿄도 고토구 아리아케 테니스의 숲(有明テニスの森) 근처에서 당시 5세였던 노모토 아야코(野本綾子)에게 “아저씨는 카메라맨이야. 사진을 찍어줄게”라며 납치하여 시노노메(東雲) 단지에서 800m 떨어진 거리에 차를 세워 차내에서 살해했다.
진술에 의하면 이 사건에서도 그는 수상해 보이지 않으려고 아야코의 앞에 서서 7m정도의 간격을 두고 먼저 걸었다고 한다. 때때로 멈춰서 뒤에 따라오는 아야코를 확인했다고 하는데 흔히 유아 납치라고 생각하면 강제로 아이를 차에 태워 데려가는 인상이지만 미야자키는 머리를 써서 아이가 자신을 따라오게끔 만들었다고 한다.
경계를 풀기 위해 츄잉껌을 건넸는데 아야코가 미야자키의 손이 이상하다고 놀리자 홧김에 목을 졸랐다고 했다. 그 뒤 인근 숲에 유기했던 다른 피해자들과 다르게 미야자키는 자택의 방으로 시신을 옮기고 옷을 벗겨 알콜 같은 것으로 몸을 닦아낸 뒤 유린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4번째 살인은 굉장히 엽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여러 종류의 톱으로 아야코의 목을 먼저 절단하고 나서 손목과 발목을 절단 후 발목에 줄을 묶어 정육점의 고기처럼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절단한 동체를 방바닥에 정좌하는 듯이 앉히고 며칠간 방치하거나 시체의 일부(손목)를 직접 구워 먹고 피를 비닐 주머니에 담아 마시는 도저히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다만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상성(정신적 이상)을 강조하기 위한 허위사실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며, 판결에서도 이 같은 의견이 인용되었다.) 이후 시체가 부패하여 냄새가 심해지자 시신의 머리를 절단하고 나머지 역시 난도질하여 머리를 제외한 부분을 한노시 미야자와호수 공동묘지(宮沢湖霊園) 쓰레기통에 버리고 도주했다. 이렇게 버려진 아야코의 시신은 11일에 부패한 냄새를 맡은 참배객 회사원이 발견해 신고하게 되며 발견되었고, 경시청과 사이타마현 경찰의 합동조사본부가 만들어진다. (이 장소는 사건 발생 이후 철거되어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한편 머리는 벽장 안에 보관하다가 숲에 유기했다. 이러한 행위를 한 까닭에 대해 처음 간이감정 문진기록에서 그는 "아무래도 2차원보다는 3차원이 좋았다"고 설명했지만 1차 감정에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최후 피고인 질문에서는 ''갑자기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며 오락가락했다.
일본 경시청에 따르면 초등학생 이하의 범죄 피해자가 토막 살인된 것은 이 사건이 최초라고 한다.
발각
미야자키 츠토무의 정신나간 범죄 행위는 이후 1달여가 지난 1989년 7월 23일 도쿄도 하치오지시에서 막을 내렸다.
히에다 신사(日枝神社)의 공터에서 놀고 있던 두 자매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준다며 자매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4장의 평범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언니(당시 9세)에게 잠깐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 다음 동생(당시 6세)를 풀숲으로 데려가 성기에 카메라 렌즈를 넣으려고 하였지만 위험을 느낀 언니가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려 뛰쳐나온 아버지에게 제압당했다. 미야자키가 깜짝 놀라 도망가려고 하자 자매의 아버지가 ”차 번호 기억해뒀으니 도망쳐도 소용없어!“라고 외쳤고, 이내 다시 되돌아와 모습을 드러냈다. 미야자키는 분노하는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안 할 테니 제발 경찰에는 말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지만 이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찰관에 의해 현행범으로 잡히게 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아직까지 그가 이전 4번의 사건의 범인인지는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도쿄도와 그 인근에서 계속해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당연히 의심을 받게 되었고 관련 수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츠토무는 이전의 사건들은 자신의 짓이 아니라고 부인하였으며 조사관의 물음에도 무언으로 일관하거나 자신이 하지않았다고 거짓말로 일관했다. 그러나 결국 계속된 수사로 8월 9일 네 번째 사건의 범행을 자백하게 되었고, 실제로 10일 아야코의 두개골부가 그가 자백한 장소에서 발견되게 되며 그가 범인임이 확실시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미야자키 가에서 운영하던 아키카와 신문사(秋川新聞社)와 자택에 수많은 기자와 매스컴이 들이닥쳤는데 그의 아버지는 평온하게 “우리 아들은 그런 짓을 할 애가 아니다”라고 얘기했고 “그럼 아들의 무죄를 증명해야하니 방을 보게 해달라”는 취재진의 요구에 “방에 가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묘한 답변을 했다. 그리하여 일본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그의 방이 공개되었다. 보통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이 먼저 가서 폴리스라인을 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경찰이 기자들보다 1시간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촬영을 막기 전까지 마음대로 미야자키의 방을 관찰할 수 있었다.
한편 미야자키를 제압하던 아버지는 “4번째 사건의 범인도 아직 잡히지 않았는데!”고 외쳤다고 하는데, 그 "4번째 사건"의 범인이 자신이 잡은 미야자키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아연실색했다고 당시 매스컴의 인터뷰에 대답했다.
이후 11일 마야자키는 아야코의 납치, 살인, 시체유기 혐의로 재체포되었다. 그리고 계속된 조사 끝에 8월 13일에는 마리와 에리카의 납치 살인을 자백했다.
21일에는 경찰이 그의 방 등에서 입수한 5,763개의 비디오 테이프 중에서 마리의 시신을 촬영한 테이프를 발견하였다. 이후 23일에는 아야코의 테이프도 발견되었다. 동시에 호러 영화와 로리타(로리)계 상업지 몇 편 역시 발견된다.
그는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두 번째 범죄를 제외한 모든 범행을 인정했으나 결국 조사관의 면밀한 프로파일링과 함께 차량 안에서 장갑, 비닐끈, 루미놀에 의한 혈흔 증거까지 발견됨에 따라 9월 5일에는 마사미의 살해까지 자백하게 된다. 이후 9월 6일 자백의 내용에 따라 그가 찾지 못하던 마사미의 유골이 발견되었고, 9월 13일에는 마리를 화장한 뒤 남은 유골까지 발견되었다. (택배로 배송한 것 이외의 남은 유골)
이에 따라 네 사건의 모든 유골(시신)이 발견되게 된다.
공판과 최후
채포 1년 반이 지난 1990년 3월 30일부터 공판이 시작되었다.
이후 범인의 범행 동기에 대한 질문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일단 범행 자체가 상당히 엽기적이고 잔인하여 여러 추측이 난무하고 미야자키 본인 또한 계속해서 주장을 번복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재판에서도 범행 동기를 완벽히 특정하지는 못했다.
일단 소아성애자 또는 시체성애자인가에 대해서는, 감정을 맡은 의료진에 따르면 소아성애자나 시체성애자의 경향이 있다기보다는 성인을 포기하고 그 대체재로서 소아를 노리게 되었으며 시체에 대한 유린행위는 감정적이고 우발적인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한편 미야자키는 꾸준히 정신분열(다중인격) 등의 정신이상을 주장했다. 재판 도중 "깨지 않는 꿈 속에서 했던 느낌이었다", "쥐인간이라던가 또 다른 자신이 나와 범죄행위를 벌였다" 는 등 다중인격으로 의심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재판 중 자신의 발언이 아닐 때에는 그림을 그리는 등 불량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구치소에서도 몇 장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해당 링크에서 볼 수 있다.)
만일 이가 인정될 경우 정신이상자에 해당되어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기에 그가 정말 다중인격자인지, 아니면 그런 척을 하여 감형을 노리는 것인지의 여부가 재판의 가장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사건 발단 3개월 전인 1988년 5월 11일 미야자키 츠토무가 평소 잘 따르던 자신의 친할아버지가 강아지와 산책 중 뇌출혈로 급작스럽게 사망한 후부터 미야자키가 급격스럽게 변해갔다는 주장 역시 있었다. 실제 5월 21일의 추모회에서 그는 친척들에게 갑자기 폭언을 퍼부었고, 49재 때는 가족들과 언쟁하다 창문 유리를 깨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 즈음부터 비디오 렌탈샵에서 테이프를 절도하고, 카메라로 여성들을 찍으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등의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렌탈샵에서의 절도는 이후범행 중에도 계속되었다. 범행이 한창 진행되던 1988년 12월에는 모아둔 돈이 없어졌다는 아버지의 물음에 격노하여 차량 문짝에 아버지의 머리를 끌어당겨 박아 버렸는데 이 일로 아버지는 머리를 절개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병문안을 가던 차 안에서 어머니가 이에 대해 주의하는 말을 하자 어머니까지도 폭행했다.
결국 채포 1년 반이 지난 1990년 3월 30일에 도쿄지방법원에서 시작된 1심 공판은 판결까지 7년의 시간이 걸리게 되었고, 그 중 절반은 2차례에 걸친 츠토무의 정신 감정에 소모되었다.
1차 감정결과 '극단적인 인격적 편향(즉, 인격장애)'으로 정신장애는 아니며 완전한 책임 능력이 인정되었으나 2차 감정에서는 '다중인격'과 '조현병'으로 책임 능력이 일부 부정되었다. 이 경우 심신미약으로 분류되어 사형 선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법원은 1차 감정 결과를 수용했고 1997년 4월 4건의 아동 유괴살인 혐의를 적용해 1심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변호인 측은 항소하여 2심이 열렸고, 여기서 재감정을 청구했지만 기각되었다. 이후 10회에 걸친 피고인 질문 끝에 2001년 6월 28일 최종적으로 항소가 기각되고 도쿄고등법원 2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된다.
같은 해 7월 10일 상고하여 3심을 열려고 하였으나 최고재판소 측은 상고의 사유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1월 17일 이를 기각하고 2심의 판결을 유지하도록 했다. 변호인 측은 마지막으로 재상고하였으나 역시 기각됨에 따라 결국 사형 판결이 2006년 2월 1일 확정되었다.
2년 뒤인 2008년 6월 17일 검찰청의 사형 집행 명령으로 사형이 집행되어 최후를 맞았다. 향년 45세. 방을 나와 사형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간수장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가 아닌 "아직 못 본 비디오가 있는데 말이지."였다고 하는데 이는 사형수 전문 인터뷰어인 저널리스트 오즈카 노타카의 발언에 기반했다.
한편 각 사건 이후 장례식은 가족,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각각의 집 혹은 장례식장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가해자인 미야자키 츠토무의 사형 후 남겨진 유골은 친모가 인도하길 거부해 무연고화되고 말았다.
반응
범행이 범행인 만큼 일본 사회 전반에서 큰 충격과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이 과거 일본에서 수차례 벌어진 아동 성범죄, 살인 사건 이상으로 부각된 가장 큰 이유는 피살자가 무려 4명인 데다, 언론에 의미심장한 도전장을 보내거나 피해자의 부모에게 딸의 신체 일부를 보내는 등 제정신이 아닌 짓들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사건 이후 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안 부모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픔에 잠기고 인생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피해자들의 부모들은 "그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에 이례적으로 프로파일링을 수사기법에 동원하면서 프로파일이 일본에서 쓰인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히키코모리와 오타쿠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했다. 느지막이 그 세계에 뛰어들었기에 당시 예닐곱 가지가 있던 애니메이션 잡지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을 골라 매달 샅샅이 읽으며 ‘압축 덕후화’를 추진했다. 공부에도 사회에도 별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거의 살아가는 낙 그 자체였다. 그러다가 고3 때 어떤 사건을 맞게 되었다. 소위 ‘연속 유아 유괴살인 사건’이다. 네 명의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죽인 이 사건의 범인은 20대 청년이었는데, 그를 통해 일종의 사회문제로 부각된 것이 ‘덕후’(마니아를 일컫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어로 빗댄 말)였다. 티브이에서도 거의 매일 그의 ‘병적인 행태’가 보도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거의 외우다시피 하며 애독했던 애니메이션 잡지를 끊었다. 다른 ‘덕후’ 친구들에게도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덕후의 징후’로 보일 만한 것을 내 몸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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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에후 일본 언론들에서 '자기방(房)족'(현재의 히키코모리에 해당) 문제가 폭넓게 제기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