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6.4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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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주도로 1989년 4월 15일에 시작되었으며, 중국 공산당 정부의 군대가 전차들을 앞세워 유혈 진압하여 1989년 6월 4일에 비극적으로 끝을 맺은 중국의 민주화 운동.
명칭
학자들이 천안문 항쟁 혹은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공식 명칭은 아니다.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감안하여 한국에서도 거의 천안문 사태로 부른다. 따라서 언론에서도 거의 대부분 천안문 사태라고 언급한다. 일각에서는 천안문 사태라는 명칭이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쓰인다고 비판한다. 일본에서는 주로 천안문 '사건'이라 칭하며 앞에 간혹 六四 또는 1976년과의 구별을 위해 2차를 붙인다.
강경 반중 인사들은 피의 일요일, 천안문 대학살(Tiananmen Massacre) 등으로 부른다. 다수 학자들은 '1989년 톈안먼 광장 항쟁(Tiananmen Square Protests of 1989)'이라고 부른다. 1976년 천안문 사태와 구분하는 뜻으로 '제2차 천안문 사태'라는 명칭도 제법 알려져 있다.
중국 정부 당국에서는 과거 '반혁명폭란'이라고 칭했으며, 이후 공산당 역사결의를 통한 현재 공식 입장은 '1989년 춘하지계 정치풍파'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철저한 검열을 통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취급하기 때문에, 외교부에서 외신 기자들의 괸련 질문에 대응할 때도 "이미 정론이 나온 사안"이라며 직접적인 언급 자체를 거부한다.
중국 관변학자들은 '톈안먼 광장 사건(Tiananmen Square Incident)'이나 '6.4 사태(June Fourth Incident)'라는 용어를 쓴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할 때에는 '1989년 반정부정치폭란'이라고도 한다. 또는 공산당의 당론을 따라 '1989년 춘하지계 정치풍파'라는 보다 순화된 표현을 쓰기도 한다. 중화권에서는 유혈 진압이 일어난 6월 4일에서 따와서 '류쓰(六四)', '육사사건(六四事件)'이라고 부른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六四를 그대로 썼다가는 바로 검열을 받아서 그런지 5월 35일, VIIV, 8², 8964 등 다양하게 부르는 모양이다.
주도 계층
不自由毋宁死
LIBERTY or DEATH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1989년 5월 14일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모인 시위대가 들었던 현수막 속 구호. 패트릭 헨리의 유언을 인용한 것이다. 지금은 천안문 6.4항쟁을 상징하는 구호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All power belongs to the people.
모든 권력은 인민의 것이다.
反官僚, 反腐, 廉潔的中國共產黨萬歲!
반관료, 반부패, 청렴한 공산당 만세!
천안문 6.4항쟁 당시 시위자들이 외친 구호였다.
杜絶權力腐敗和腐敗! 確保機會均等!
권력 비리 부정 부패를 척결하라!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라!
천안문 6.4항쟁 당시 시위에 나섰던 학생들이 외첬던 구호.
人民不會忘記
인민은 잊지 않는다.
'홍콩 6.4 기념박물관'에 걸려있는 현수막에 먹으로 써 놓은 천안문 6.4 항쟁 당시의 구호였다. 이 구호는 지금까지도 상당히 대조적인데, 위 구호의 의미와는 달리 현재 중국 내에서는 교육은 물론 언론까지 통제된 채로 천안문 6.4 항쟁이 잊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콩 국가보안법이 발효된 2020년대 이후로는 그 홍콩에서마저도 서서히 잊히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식인들, 대학생들이 주도했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계각층의 시민들도 많이 참여했다. 그들 중에는 상인, 노동자, 언론인, 의사, 교사, 대학 교수, 심지어는 공안, 법조인, 공무원도 있었으며 적게는 9살짜리 아이에서 많게는 백발의 노인까지 참여한 범대중적 평화 시위였다.
베이징노동자자치연맹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천안문 항쟁 당시의 주요 노동단체는 “베이징노동자자치연맹”(Beijing Workers' Autonomous Federation, 중국어 약칭 공자련)이라는 노조였다. 이전의 당이 통제하던 어용노조 같은 것이 아닌 노동자의 실질적인 권리와 공산당 권력을 감독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 중국 최초의 독립 노조였다. 노조는 6월 3일 중국 공산당 군대의 유혈 진압에 당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자율노조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는 Walder와 Gong의 피인용수 168회 가량의 논문이다.
노조는 1989년 5월 19일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까지는 민주화 운동에서 눈에 띄지 않았다. Walder와 Gong은 노조가 격변의 결과로서 성장할 수 있었음을 언급한다.
- "10년 전 폴란드 노동자 운동의 관점에서 볼때, 공자련의 정치적 의미는 실로 제한적이다. 사건 직후에 작평된 평가에서 우리는 공자련이 원인보다 격변의 결과임을 관찰했다. 그들은 훨씬 더 큰 학생 운동, 정부의 분열, 그 결과로서 만들어진 정권의 정치 기구의 마비로 인해 형성된 정치적 공간을 사용하는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
(원문 : From the perspective of the Polish workers' movement a decade before, the political significance of gongzilian appears limited indeed. In an assessment written shortly after the events, we observed that gongzilian 'was more a result of the upheaval than a cause', a movement that took advantage of the political space created by a much larger student movement, the disunity of the government, and the resulting paralysis of the regime's political apparatus.)
그런 이유로 공자련은 5월 19일 계엄령 선포 이후로 급성장을 할수 있었는데 계엄령 기간 내내 투쟁하며 함께 주장된 성명과 전단 등에서는 우리가 국가주인이며, 소수의 타락한 국가와 노동계급이 우리의 이름을 빼앗고, 학생들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살해하고, 인권탄압을 하는것을 용납해선 안된다는 주장, 200주년을 앞둔 프랑스 대혁명에 비유하여 바스티유 습격을 촉구하는 주장, 파시스트 정부와 스탈린주의 체제를 타도하자는 주장, 자유와 민주주의 아래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 "스탈린주의의 마지막 요새인 20세기 바스티유를 휩쓸어라", "덩샤오핑을 몰아내야 한다"와 같은 주장들이 적혀 있었다.
군대의 진압 직전인 1989년 6월 3일 당시까지 2만 명 가량의 노조원을 보유했었다. 1989년 6월 4일 광장에는 150여명의 노조원이 있었고 뒤이어 이어진 진압과 체포로 그 회원 대부분이 몰살되었다.
Walder와 Gong은 공자련과 학생들은 노동권을 중시하는 공자련, 이념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학생층의 차이와 갈등 때문에 두 집단은 제대로 협력 할 수 없었음을 언급하며, 학생, 지식인 그리고 노동자 간의 장벽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중국의 민주화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공자련의 지도자는 한동팡(Han Dongfang)이라는 노동운동가였는데 그와의 인터뷰에서 공자련을 엿볼 수 있다.
항쟁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는 물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운동이 시작된 날인 4월 16일, 2~3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왜 후야오방이 죽어야 했는지, 어째서 내부 민주주의가 없었는지, 무엇이 민주주의인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민주주의를 독립적인 의미로서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의 민주주의'와 같이 항상 다른 개념에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바는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어 민주라는 단어는 “민중이 주인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노조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 노동자들에게 남긴 공포의 흔적과 학생들과의 연대도 언급한다.
5월 하반기, 17일 23일 28일에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많은 노동자들이 서로 다른 공장에서 트럭과 깃발을 가지고 광장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접근하여 노조에 들어올 수 있는지 물었을 때, 그들은 한걸음 물러서며 단지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왔고 복잡한 상황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어느정도 문화대혁명 이후의 공포의 흔적이었습니다. 반혁명적인 개인으로 낙인 찍히는 것보다 반혁명 조직의 일원으로 간주되는 것은 훨씬 더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개인으로서 시위에 참여하여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습니다. 6월 1일 혹은 2일 경에 왕차오화(Wang Chaohua)를 비롯한 몇몇의 학생들이 토론을 위해 우리 텐트로 왔습니다. 그들은 학생 동원이 탄력을 잃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어떻게 조직될 수 있는지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학생들이 이것에 대하여 우리와 이야기 한 것은 처음이었고 저는 매우 고무되었습니다.
6월 4일 탄압에서의 일화에서 공자련과 한동팡에 대한 이미지를 엿볼 수 있었다.
6월 3일 밤 11시 30분경, 15~20명의 젊은이들이 나를 찾으러 왔습니다. 내 동료들이 그들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내 밀치고 들어와서 내가 그들과 함께 가야하며, 여기서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소개하지 않고서 내가 여기서 머물러선 안되며 나를 폴란드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의 레흐 바웬사에 비유했습니다. 물론 나를 그렇게 여겨줘서 좋았지만 내 목숨이 다른 이들의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망치는 것은 부끄러운 행동이었습니다. 나는 머무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떠났지만 5분뒤에 다시 돌아와서 그 중 한명이 말했습니다 “실례지만 같이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임무이며 당신의 운명입니다.” 아주 강한 친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손짓했고, 그 중 몇 명이 나를 태우고 텐트 밖으로 이동했습니다. 군대는 서쪽에서 이동중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총알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둘러싸고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북서쪽 구석에서 우리는 불타는 탱크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공안 본부를 지나 베이징 호텔을 지나쳤고 그곳에서 한남자가 피를 흘리며 한손으로 자전거를 타고 동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가 새벽 1시경이었고 내가 살던곳인 장안가 동단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제 도시를 떠나십시오. 우리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광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말하곤 사라졌습니다. 나는 그들이 살아남았는지, 부상을 입었는지, 감옥에 갔는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특집 : 사진으로 보는 당시 천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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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는 최소화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봐라!"
덩샤오핑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총리 리펑에게 무력 진압 명령을 내리면서 남긴 말이다. 리펑 본인의 회고록에서 나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