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남 지역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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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p4922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9월 4일 (월) 10:0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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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지역과 호남 지역 간의 갈등. 다른 지역갈등이 대개 문화, 민족, 종교, 언어 등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과 달리 정치적 목적으로 생성되었다.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권위주의의 재생산이든 기득권의 방어든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욕구를 실현하는 데 반호남주의의 효과를 필요로 하는 체제와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이를 말하지 않고 사람들이 호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수백 번 여론조사하고, 영호남 간의 화합과 단결을 수천 번 강조해도,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지역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이데올로기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지역주의를 이데올로기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만들어진 현실 박상훈 저-

요컨대 지역주의 문제와 관련해, 호남 출신의 경우 ‘사회구조적 차별’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체제’와 비판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반면, 비호남 출신의 경우 호남 사람의 타고난 부정적 특질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가해자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김진국 1988, 236).

사회적으로 유해하고 민주적 가치에 상응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 모두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야 할 지역주의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반호남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는, 호남 출신에 대한 차별에 그 핵심이 있다. 반호남주의는 호남 출신에 대해, 거리감과 배제적 행위를 동반하면서 엘리트 충원과 경제 발전의 성과를 차별적으로 배분하고 소외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 호남이 동질적 투표 행태를 통해 집단적 항의를 나타냈다고 해서 이를 같은 지역주의라고 일률화해서 비난할 수는 없다. -만들어진 현실 박상훈 저-

따지고 보면 이것 때문에 오히려 안심이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지역감정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영호남 정도는 그냥 친구 수준이다. 물론 그 경우들이야 대개는 수천 년을 따로 살다가 정치적 이유로 한 나라로 묶이면서 생긴 사단이지만 이 경우는 적어도 천년 이상을 한 나라, 한 민족으로 살아온 사람들 간의 문제라는 점에서 애초에 다른 케이스.

이 지역감정이 1970년대 이전에도 있었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데 주로 1950년대에도 호남에 대한 지역감정이 있었다는 증거로, 1959년 잡지 월간'야화'(夜話) 6월호에 조영암(趙靈巖)이라는 작가가 전라도 주민들을 가리켜 개땅쇠, 하와이, 인류가 아니다 라는 식으로 사적인 감정을 담은 글을 실은 사례를 든다. 이 하와이란 명칭에 대한 은 민들레씨처럼 떠돌지만 미군정이 우리나라에 가설한 직통전화의 지역별 호출 암호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산 미 제98군정 그룹을 플로리다, 광주 미 제101군정 그룹을 하와이로 한 데서 나왔다는 것인데,유독 하와이만 기승을 떨쳤던 건 1. 조정래 작가의 소설 <한강>에서도 묘사된 이승만의 ‘하와이’ 야유와 2. 조영암의 필화가 한몫했을 수도 있다. 즉 이승만이 공석에서 최초 언급하고, 이후 작가 조영암이 잡지에 실어 해당 단어를 알린 덕분에 유독 하와이란 미군정 지역 호출명이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이 하와이란 명칭이 호남지역을 나타내는 말로 "공식석상에서 최초로 등장"한 건, 이승만이 백범을 열렬히 환영하며 강연을 요청하는 호남인들에 관한 소식을 들은 후, 젊은시절 외교독립노선을(이승만과 정한경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 위임통치 청원서’를 보냄) 지지하지 않았던 하와이 교포들에 빗대며 화를 낸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조정래는 소설 <한강>에서 주장한다. 8·15 해방 후 통일지향의 김구와 분단지향의 이승만은 대립했는데, 백범이 전국 순회강연에 나섰다. 큰 도시에서만 강연을 하곤 지나치려는데, 유난히 열렬한 호남에서는 “작은 군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와 겹겹이 기찻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김구는 예정에 없던 강연을 하고서야 기차가 움직일 지경”이었다. 이 보고를 다 받은 이승만이 기분이 나빠져 한 마디 내뱉은 것이 "하와이놈들 같으니라고!"었다는 것이다. 하와이에서 독립투사 박용만에게 미국의 위임통치를 중심내용으로 하는 외교노선을 주장하다 쓴맛을 본 이승만의 트라우마였으며, 경무대에서 궁중용어를 쓰던 시절이었던 만큼, 그 궁중용어의 대상(이승만)이 쓰는 표현 역시 그 주변 지도층 인사들에게 파장이 있었던 것이다.

영남과 호남간의 지역감정은 사실 실질적으로 그 지역 주민들의 살림살이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껏해야 정치 엘리트와 지역 토호 몇몇의 이해관계와만 결부되었을 뿐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의 실질적인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큰 지역감정은 수도권 vs 지방이다. 하지만 무려 35년 이상 대통령 등 국가권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영남의 케이스처럼 정치권력이 국가의 집권 세력의 다수로 장기간 국가 주도 개발을 해오면서 인구와 예산, 산업 등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지역 주민들에게도 상당히 미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한 엄청난 경제적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국가주도 개발시기에 영남 쪽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경제권력을 쥐게 된 재벌들이 수두룩했고, 지금도 그 영향력이 상당부분 남아 있다. 사실 이처럼 과거부터 관가와 민가에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곳들의 인사권과 예산권을 장악하는 것으로 지역에 따라 주민들조차 유불리를 겪을 수 있었고, 과거 사례라 통신과 촬영, 녹음기술 등이 발달한 현재와 달리 증거를 묻어버리기도 쉬웠는데 특히나 이승만, 박정희를 겪었던 한국에서는 정치권력이라는 건 거의 모든 분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전리품이었다.

요약하면 결국 호남에 대한 경제적 소외와, 호남 소외의 원인을 여러가지 이유로 영남 집중에서 찾았던 것. 양 지역 주민들의 발전 욕구가 정치적인 요구로 분출되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이 7대 대선에 폭발해서 지금까지 내려왔다는 분석이 다수설이며, 호남 소외에 대해선 세월이 흐르며 지역감정을 대놓고 조장하는 것을 자제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왔고, 21세기 들어서는 워낙 수도권 집중이 심해 영호남을 막론하고 지방 전반적인 경제가 침체, 하향평준화되고 있어서 대결구도도 다소 완화되어왔지만, 여전히 수출경제로 인한 입지적 조건과 압도적 인구수의 차이로 인해 영남과의 차이를 좁히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심지어 그 격차가 줄어든 편인 21세기에도 정권에 대한 불만이 지역감정으로 변질되어 더더욱 극복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대해선 여론을 주도하는 특정 세력이 있다는 점 등도 원인일 수 있다. 그래서 양 지방 간에 혐오와 이에 대해 반작용이 나오면서 민생과는 관계 없는 갈등 구도가 생긴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과거 1970년대~199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영호남간 지역갈등은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어 더 이상 수습을 못할 정도로 사태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영화 《황산벌》 이나 《위험한 상견례》 등 각종 매체에서도 이와 관련된 블랙코미디를 볼 수 있다. 또한 최순실 게이트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최씨 무리들이 청와대 뉴미디어실을 통해 일베 같은 극우성향 사이트의 글들을 꾸준히 모니터링 후 "확산을 지시"했으며, 재단 직원 채용에서 특정 지역 출신 사람 채용을 꺼렸다는 풍문들도 보도되면서, 무언가의 이득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갈등을 주도하는 특정 세력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이 어느 정도 현실로 입증되기도 하였다.

많은 극복의 움직임이 있지만, 그것이 지역감정이 적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매우 성급한 일이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를 수 있으나, 아직까지 영남/호남에서는 정당을 보고 투표하고 있다. 해외에서 유행하던 래디컬 페미니즘과 대안 우파 사상의 전파로 남녀간의 갈등도 심해졌으나, 젊은 층에서 회자되는 문제기 때문에 아직 지역감정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