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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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p4922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5월 19일 (목) 08:18 판 (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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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이다.

전문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1]을 깐,

한방[2]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3].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4]에 북덕불[5]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6],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7]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8]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9]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10] 먼 산 뒷옆에 바우 섶[11]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12] 갈매나무[13]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1] 삿자리,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2] 냉랭하고 쓸쓸한 방[3] 주인집에 세 들었다[4] 작은 질그릇[5] 짚이나 풀 따위가 뒤섞여 엉클어진 뭉텅이에서 피운 불[6] 구르기도 하면서[7] 행위나 현상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져[8] 천정, 지붕의 안쪽인 천장(天障)[9] 저녁 무렵, '나주'는 '저녁'의 평안 방언이다.[10] '어느'의 평안 방언이다.[11] 바위 옆[12] 깨끗하고 바른[13] 갈매나뭇과의 낙엽 활엽 관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