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개요
1988년 11월 25일부터 1989년 1월 5일까지 일본 도쿄도 아다치구에서 15~18세의 남성 비행 청소년들이 주 2회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던 17세 여고생 후루타 준코를 납치한 뒤 감금하며 온갖 가혹행위와 고문, 폭행, 성폭행 등을 저지르고 방치하여 살해한 뒤 시신을 콘크리트 등과 함께 드럼통에 넣고 유기하여 은폐한 사건이다.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35년이나 지났지만 해당 사건의 잔혹성, 극악무도함, 비인간성 그리고 사법당국의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때문에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는 사건이다.
해외에서는 都足立区女子高生監禁リンチ殺人事件(도쿄도 아다치구 여고생 감금 린치 살인사건), Murder of Junko Furuta(후루타 준코 살인사건)이라고도 불린다.
피해자 후루타 준코(古田順子, 당시 17세)는 사이타마현 미사토시에서 태어나고 자라 사이타마현 야시오시 미나미가와사키 소재 모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으며 1989년 3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전 판매점에 취직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그녀는 창창한 미래를 앞두고 있었으나, 후술할 극악무도한 범죄의 타깃이 되어 버렸고 이로 인해 18세 생일을 불과 2주 앞두고 사망했다.
사건 전개
11월 25일
1988년 11월 25일 오후 8시 30분경, 사이타마현 미사토시에서 강간할 여성을 찾고 있던 미야노 히로시(소년 A, 주범, 당시 18세)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후루타 준코(당시 17세)를 발견했다. 그는 함께 있던 자신의 부하 미나토 신지(소년 C, 당시 15세)에게 "내가 잘 해 볼 테니 저 여자를 발로 차."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미나토 신지에 의해 타격을 받은 준코는 무릎이 까지며 도로 옆의 도랑에 자전거와 함께 넘어졌다. 그때 준코의 곁에 히로시가 나타나 "저 녀석은 이 마을의 유명한 변태다. 나도 저 녀석에게 칼로 위협당했다. 여긴 위험하니 데려다주겠다."라고 말을 걸었고. 둘은 대화를 하면서 천천히 준코의 집 쪽으로 걸어갔다.
히로시는 준코의 집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어두운 창고 앞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나는 야쿠자의 간부다. 야쿠자가 너를 사고로 위장해 차로 치어 죽이기로 되어 있다. 얼마 뒤 차도 이리로 오겠지만, 내게 몸을 바치면 용서해 주겠다."라고 말하며 준코를 키타아야세역에서 가까운 WINGS 호텔(사건 이후에도 그대로 영업 중)로 데려가 강간했다. 참고로 실제로 미야노 히로시는 야쿠자 조직인 극동회 청년부 산하 조직인 극청회의 두목이었다. 현재는 극청회에 관하여 아무 소식이 없는데 히로시가 수감된 후 사건이 발각됨과 동시에 그가 속헀던 조직도 와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원래는 야쿠자가 너를 죽이기로 되어 있었지만, 너는 내 여자친구와 닮았으니 살려 주고 싶다. 너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윗선과 잘 얘기해 볼 테니 그때까지 여기에 있어라."라고 말하며 준코를 안심시켰다.
그 직후, 히로시는 납치 당일 자판기 앞에서 행인을 대상으로 퍽치기를 하던 동료 오구라 유즈루(소년 B, 당시 17세)와 와타나베 야스시(소년 D, 당시 16세)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를 하나 잡아 두고 있다. 너희들 같이 먹어 버리지 않겠냐?"라고 말하며 그들을 불러냈다. 이때 유즈루는 히로시와 전화를 하며 "여자를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 "그냥 납치해 버리자" 등의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준코를 수차례 윤간한 뒤, 호텔에서 끌고 나와 근처 밤거리를 함께 돌아다녔다. 이때 준코는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생전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된다.
도중 차 안에서 히로시가 준코에게 "신지가 너를 좋아한다. 신지와 사귀어라."고 명령했지만 준코는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남자를 사귀기 곤란합니다."라고 대답했고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히로시는 준코에게 "교육을 시켜주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던 중, 히로시와 유즈루가 술을 마시러 자리를 떴고, 신지의 집 근처 공원에서 대기하던 나머지 일행들은 추위를 피해 가까웠던 신지의 집에 준코를 데려가 감금하게 된다. 이후 준코의 감금 생활이 시작된다.
11월 27일
길에서 행인을 폭행하고 있던 히로시는 함께 어울리던 나카무라 테츠오(소년 E, 당시 16~17세)와 이하라 코이치(소년 F, 당시 15~16세)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겠다"라며 불러내어 23시경 신지의 집에 자고 있던 준코의 앞에 나타난다. 히로시는 준코에게 겁을 주려고 감기약을 각성제인 척 복용하고 약에 취한 듯 행동하며 피해자를 넘어뜨렸다. 한편 신지의 형 역시 집에 있었고 준코의 감금 사실 역시 알고 있으면서 동조하고 있었다. 신지의 형이 쿠션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누르자 피해자는 소리치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비명으로 인해 신지의 부모가 2차례 찾아온다. 먼저 신지의 어머니가 2층에서 나온 소음에 방문을 열어 확인하려 했으나 조명이 꺼져 스탠드만 있던 상태였기에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이후, 준코가 비명을 지르자 신지의 아버지가 올라와 문 앞까지 와서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지?"라며 무슨 상황인지 물었으나 신지가 "상관하지 마"라고 소리 지르자 돌아갔다.
일련의 과정으로 화가 난 가해자들은 2시간 동안 준코의 허벅지와 다리를 집중적으로 폭행했고, 음부에 불을 붙인 뒤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입을 막고 윤간했다.
11월 30일
납치 후 5일이 지난 11월 30일에 준코 부모가 경찰에 신고할 것을 걱정한 히로시의 제안으로 가해자들은 준코에게 집에 "가출했으니 찾지 마. 친구 집에 있으니 실종 신고는 취소해 줘."라는 내용의 전화를 먼 지역의 공중전화로 하라고 강요했다. 이때 소년들은 경찰들의 위치 추적이 어렵게끔 전화를 걸 때마다 다른 장소에서 전화를 하도록 시켰다.
공중전화는 30일부터 5일에 걸쳐 3번 걸게 시켰고, 이때마다 "경찰서도 멀고, 저 차는 야쿠자의 차다. 도주하려고 하면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협박하였고 전화를 할 때도 극청회의 일원들이 옆에서 감시했다.
한편 30일 준코는 소년들과 함께 신지의 집으로 돌아와 신지 어머니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신지 어머니와 인사한 준코는 자신을 "사이타마현의 고교생"이라고 소개했고 신지 어머니는 준코에게 "늦었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준코는 소년들에 의해 2층으로 끌려갔고 신지는 어머니에게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낸다."라고 말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신지의 어머니 역시 야쿠자와 연루되어 불량한 생활을 하고 있던 신지를 두려워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제지나 신고를 하지 않았다.
12월 5일
5일 뒤인 12월 5일, 신지 방을 청소하다가 쓰레기통에서 생리대를 발견한 어머니는 2층으로 찾아가 감시 담당인 야스시와 함께 있던 준코에게 "왜 집에 돌아가지 않았냐"라고 물었지만 야스시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던 준코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준코를 가출 소녀라고 생각하고 이름을 물었지만 준코는 "사이타마현에 사는 고교 3학년 학생이고, 취직이 결정됐다"라는 엉뚱한 대답밖에 하지 못하였고 어머니는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테니 어서 돌아가라"라고 말했다. 감시를 하고 있던 야스시도 "그래, 돌아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해 식사를 시킨 뒤 준코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분위기가 됐다.
그러나 식사 도중 신지와 아버지가 돌아왔고 신지의 아버지는 신지에게 "여자친구인가? 나에게도 소개해 주렴."이라고 말을 걸었으나 신지에 의해 묵살당했다. 그 후 준코는 소년들에게 이끌려 다시 2층으로 올라가게 됐다.
12월 6일
신지의 부모님은 집에 낯선 소녀가 드나드는 걸 보고 신경이 곤두서 다음 날에 준코에게 다시 찾아와 "이 집엔 남자가 2명(미나토 신지와 그의 형)이나 있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거지?", "여긴 그 야쿠자 같은 것들(미야노 히로시, 오구라 유즈루)도 있으니 얼른 돌아가렴."이라고 말을 걸었으나 이미 겁에 잔뜩 질려있던 준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얼른 돌아가자"라며 준코의 가방과 소지품을 들고 내려왔지만 준코는 가해자들이 두려워 2층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준코 가방에서 나온 집 전화번호를 확인한 뒤 아들에게 구타당할 것을 염려해 시부모의 집으로 찾아가 준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신지 어머니가 "댁에 후루타 준코라는 딸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준코 어머니는 "지금은 준코가 집에 없습니다. 누구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신지 어머니는 주저하다가 가짜 이름을 대고 끊어 버렸다. 경찰은 신지 어머니가 댄 가짜 이름을 토대로 수사했기에 준코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신지의 집에서는 신지의 아버지가 준코를 귀가시킬 채비를 시켰고, 신지의 형과 오구라 유즈루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럼 돌아가기로 한 거지? 어머니가 걱정하시니 얼른 집에 돌아간다고 전화하거라."
"괜찮아요. 전에도 전화했으니까."
"그럼 그쪽까지 데려다줄게."
"혼자서 돌아갈 수 있어요..."
"택시비 가지고 있니? 내줄까?"
"있어요. 괜찮아요."
"그럼 곧장 돌아가렴."
"알겠습니다."
집 근처 공원에서 신지의 형은 준코를 귀가시키자는 쪽으로 유즈루를 설득했고 준코 또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 제발 집에 가게 해달라"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유즈루는 신지의 부모가 자고 있을 때 집 앞의 전봇대를 통해 준코를 신지의 방으로 올려보냈고, 준코는 다시 감금당하게 된다.
이후, 어머니가 준코의 집에 전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나토 신지는 수 시간 동안 어머니를 폭행한다.
이 시점에서 신지의 부모는 피해자가 귀가한 것으로 인지하여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사건 이후에도 "이미 준코가 귀가한 줄 알았다"라고 진술하긴 했지만, 사실은 아들의 폭행이 두려워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 가능성이 크다.
12월 7일
12월 7일, 준코는 가해자 소년들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몰래 1층으로 내려와 신고했지만 얕은 잠을 자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깬 히로시에게 들켜버리고 만다.
강제로 전화가 끊기자 경찰은 역추적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히로시는 "여동생이 장난전화를 건 모양이다, 죄송하다"라고 말하며 무마시킨 뒤 전화를 끊었다.
히로시는 고함을 지르면서 자고 있던 다른 소년들을 깨워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냐"라고 물컵을 집어던지는 등 광분하며 호통쳤다. 신고한 것도 화나는데 히로시에게 혼나기까지 해서 유즈루, 신지, 야스시도 격분했다.
준코는 소년들에게 "한 번만 용서해 달라"라고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것이 준코가 방 밖에서 한 마지막 행동이 되었다. 이때부터 준코는 죽을 때까지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지금껏 당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강도의 끔찍한 고문들을 당하게 된다.
특히 오구라 유즈루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짝사랑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감정이 뒤틀려서 이후 가장 집요하게 준코를 괴롭혔다. 다른 소년들 역시 여러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러한 소년들의 만행 중 일부는 비디오테이프에 기록되게 되었다.
한편 소년들은 준코를 감금하고 있는 동안 준코가 가지고 있던 3,000엔으로 옷을 사서 갈아입히기도 했고, 음식을 사서 먹이거나 생필품을 사주기도 했다. 또한 같은 집에 있는 신지의 형이 컵라면, 빵, 우유, 계란 등을 준코에게 먹이기도 했다. 옆방에 있던 신지의 형은 이외에도 소년들이 없을 때 한 번씩 준코를 도와주긴 했지만, 신지의 형 역시 동생과 동생 일행의 폭력에 잡혀사는 처지였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문과 폭행, 성폭행으로 인해 준코는 점점 쇠약해지게 되었고, 12월 20일경부터는 극히 쇠약한 상태가 되었다. 이때부터는 신지를 제외한 소년들은 준코를 단순히 더 이상 재미도 별로 없고 처리하기 귀찮은 물건으로 별로 찾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 신지의 집에 방치해 두게 되었다. 신지 역시 흥미를 잃어 집에 함께 있었으나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소년들은 대신 코이치에게 주로 준코를 감시하도록 했다. 다만 이후에도 코이치나 신지, 신지의 형 등이 음식 등은 먹인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12월 26일에 이르러는 준코가 1층 변소에 다녀오는데 기어서 수십 분이 걸릴 정도로 쇠약해지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고형식 또한 잘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하루에 고작 우유 2000cc 정도만을 먹게 되었다.
1월 4일
약 한 달 뒤인 1989년 1월 4일, 미야노 히로시는 전날 마작에 크게 실패해 10만 엔에 달하는 빚을 지고 야스시의 집에서 일행과 합류했다. 앞서 말했듯 당시에 이르러는 그들은 준코에 대한 흥미를 잃고 방치해 두고 있는 상태였다.
히로시는 "마작에서 진 것도 다 준코 때문이야"라며 "오랜만에 준코를 괴롭히러 가자"라고 제안했다. 이에 다 같이 신지의 집으로 가 준코를 폭행했다.
오전 8시경, 그들은 탈진한 준코를 세우고 얼굴에 촛농을 떨어뜨리거나 소변을 먹였고 양옆에서 1명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른 1명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머리, 어깨 등을 번갈아 가며 구타했다.
이때에 대해 야스시는 "딱히 관심 있지는 않았으나, 히로시와 유즈루가 두려워 폭행에 가담했다."라고 증언했다.
준코가 자력으로 일어서려다가 넘어져 카세트 플레이어에 머리를 부딪혀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히로시는 준코의 죽음을 예감했지만 꾀병이랍시고 폭행의 강도를 높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야스시가 1.74kg 짜리 아령을 준코의 복부에 떨어뜨렸으나 준코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소년들은 준코를 억지로 깨우기 위해 불로 준코의 피부를 지졌다.
준코는 처음엔 움찔했지만 후엔 미동조차 없어졌고 소년들은 "준코가 죽은 것 아닌가?"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신지는 "원래 이렇다"라고 말하였고 이에 안심한 소년들은 테이프로 준코의 발목을 묶어 방에 방치해두고 오전 10시에 막 개장한 사우나로 향하였다. 준코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감시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 전원 외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1월 5일
하루 외박을 한 소년들은 미나토 신지의 형에게 준코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연락을 받고 신지의 집으로 향한다.
당시 준코가 감금 당한 방은 안에서만 열 수 있었기 때문에 소년들은 바로 옆, 미나토 신지 형의 방 베란다에서 준코의 상태를 지켜봤는데, 준코가 이불 위에 쓰러져 있었다. 소년들은 "준코가 죽은 것 같다" 라며 들어가길 꺼렸다.
소년들이 방으로 들어갔을 때, 준코는 이미 사망하여 싸늘한 주검이 된 상태였고 소년들은 준코의 시신을 바로 앞에 두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사망 확인이 된 날은 1월 5일이지만 부검 결과 실제 사망 시점은 소년들에게 마지막으로 폭행을 당한 1월 4일로 추정된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기일(1월 4일)은 그녀의 생일(1월 18일)의 약 2주 전이었다. 또 준코가 납치(11월 25일) 된 지 3일 후(11월 28일)가 그녀의 어머니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전부터 그녀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히로시는 대낮에 자신의 집 앞 주차장으로 공범들을 불러내어 준코의 시신을 이불로 싸맨 뒤 여행 가방에 넣고 테이프로 말아 자신이 일했던 타일 공장 근처에서 가져온 드럼통에 넣어 콘크리트를 넣고 돌과 벽돌 등으로 고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드럼통을 검은 쓰레기봉투에 넣고 테이프로 밀봉한 뒤, 히로시가 빌려온 왜건 차량을 통해 도쿄도 고토구 와카스 14호지 해변 공원 정비 현장의 공터에 버리고 달아났다. 원래는 아야세 강 근처에 버리려 했으나 유즈루가 "집 근처라 귀신이 되어 나올 거 같다" 라며 무서워했다고 한다.
원래 히로시는 준코를 추모하고자 드라마 <톤보>의 마지막 회를 녹화한 비디오를 사서 꽃다발과 함께 넣으려 했다고 한다. 이 드라마에 대해서 준코가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비디오를 같이 넣으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범인을 특정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라는 유즈루의 만류로 인하여 그만두었다.
죄없는 준코를 납치, 감금해서 죽을 때까지 온갖 고문 끝에 결국 그렇게 잔인하게 죽여놓고, 이제와서 추모하는 것이 무슨 헛짓거리인가 싶지만, 체포된 후에 히로시가 밝힌 이유는 준코가 불쌍하다기보다는 준코의 원혼에 저주받기 싫어서.
만일 이 때 드럼통을 바다에 버렸더라면 사건 자체가 영영 묻힐 수 도 있는 일이었으나 드럼통을 공터에 버렸기에 이후 사건이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준코의 실종 신고가 접수되어서 경찰들도 수사를 하고 있었으나 마땅히 실마리를 잡고 있지는 못하였다...
3월 29일
이 천인공노할 사건은 이렇게 영영 묻히는 듯했으나 시체 유기로부터 약 3개월 뒤인 1989년 3월 29일 정말 뜻밖의 일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히로시는 사건 이전인 1988년 11월 8일에 있었던 또 다른 19세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 치상 및 절도 등의 혐의로 3월 29일 네리마 소년 감별소에서 아야세 경찰서 수사관의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담당 형사가 말실수로 "너 사람을 죽이면 안 되잖아?"라는 질문을 했다.
이때 히로시는 부하들이 이미 사건에 대해 자백했다고 착각한 나머지 사건의 전모를 몽땅 불어 버렸다. 정말 무섭게도 만약 담당 형사의 말실수가 없었거나, 시신을 바다에 버리거나 시신을 매장할 때 시신을 심하게 훼손시켜 시신이 발견되더라도 부검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을 정도였다면 이 사건은 실마리조차도 풀지 못하고 영원히 드러나지 않은 채 단순한 실종 사건으로 묻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히로시는 담당 형사에게 사건의 전말을 불기 시작했고 이런 조사 중이던 사건과는 관계 없는 갑작스러운 터무니없는 소리에 경찰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현장에 다급히 출동해 범인들이 자백한 공터에서 콘크리트 범벅이 된 드럼통 하나를 발견했다.
드럼통의 틈새에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경찰은 즉시 크레인을 동원해 드럼통을 그대로 경찰서로 옮겼다. 이미 드럼통 하나의 무게만 해도 굉장히 무거운데, 거기다가 약 40kg가량 되는 준코의 시신, 이불, 가방, 그리고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까지 더해져서 전체 무게는 305kg에 달했다.
3월 30일
오후, 경찰서에서 해체 작업이 시작됐고 곧 보스턴백에 담겨 두 이불에 싸인 준코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미 사망한 지 3개월 가까이 지난 데다 당시 온전한 상태로 사망해서 유기된 것도 아니라 부패가 매우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였다.
당연히 경찰들은 히로시가 밝힌 사건의 전모가 사실임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이후 사건의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되었다.
피해자가 당한 일
재판에서 공개된 범행이 워낙 끔찍했던지라 세상에 알려진지 35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가 되고 있는데, 인터넷 등지에서는 사실 확인이 안 된 범행들도 많이 적혀 있다.
인터넷에 적혀 있는 글을 읽을 때 곧이곧대로 믿는 건 곤란하고, 와전된 범행 루머는 피해자의 유족에게도 상처를 줄 수 있다. 아래에 서술한 내용은 헤이세이 21058 판결문에서 공개된 내용만을 담았다.
- 각성제를 먹고 피해자에게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피해자를 억누르고 옷을 강제로 벗겨 윤간하였다. 그 후 면도기를 꺼내 음부를 제모하고 음부에다 성냥을 넣고 불을 붙였다.
- 12월에 피해자가 도주를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이에 분개하여 얼굴을 마구 때렸고 발목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화상을 입혔다.
- 알몸 상태로 디스코의 곡에 맞추어 춤을 추게 하거나 자위행위를 강요하거나 피해자의 얼굴에 매직 펜으로 수염을 그리는 행위를 했다.
- 피해자의 음부에 철봉을, 항문에는 병을 삽입하였다.
- 시너를 흡인시키고 위스키, 소주 등 술을 강제로 마시게 했다.
- 겨울 한밤중에 피해자를 반나체로 베란다로 내쫓은 뒤 우유, 물 등을 다량으로 먹이고 담배 두 개비를 한 번에 빨게 하였다. 준코가 담배를 뱉자 소년이 좀 더 따뜻하게 해주겠다며 몸에 불을 붙였다.
- 12월 중 ~ 말에 걸쳐 소년 A가 피해자가 흘린 소변을 밟았다는 핑계로 소년 B, 소년 C와 함께 피해자의 얼굴을 여러 차례에 걸쳐 때려서 얼굴이 부어올랐는데 그걸 보고 재밌어하며 웃었다.
- 그 이후로 학대는 더 심해져서 피해자의 허벅지와 손 등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불이 꺼지면 다시 기름을 붓고 붙이는 걸 반복했는데 이 무렵 피해자는 죽여 달라고 애원하였다.
- 입이나 귀, 항문이나 질에 불꽃놀이용 대형 폭죽을 넣고 동시에 터트렸다. 그 과정에서 준코에게 웃거나 노래 부르라고 했다. 표정이 웃다가 일그러지면 더 극심한 폭행을 가했다.
- 가해자 주범은 12월 중순경부터 주로 소년 F에게 피해자를 감시하도록 맡겼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피해자에게 음식을 조금 밖에 주지 않았고 12월 말에는, 우유 조금만 주었다. 피해자는 영양장애와 가해자의 거듭된 폭행으로 극도의 쇠약상태에 빠져 식욕이 감퇴하고, 안면은 부어오르고, 화상 때문에 피부에 고름이 생겨 악취를 풍겼다. 아래층 화장실에 가는 것도 어려워지자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상황이 되었다.
- 피해자에게 양갱을 보여주며 이것은 무엇이냐고 물었고 피해자가 양갱이라고 대답하면 왜 이름을 함부로 부르냐고 하고 "양갱씨"라고 하면 왜 양갱에 "씨"를 붙여 부르냐며 또 이를 핑계로 괴롭혔는데 폭행을 하고 나서 밀랍에 불을 붙인 뒤 피해자의 얼굴을 덮을 정도로 녹인 밀랍을 떨어뜨렸다. 이 때 피해자의 반응이 거의 없었다.
- 피해자가 쇠약해져서 화장실도 갈 수 없게 되자 음료팩에 소변을 봤는데 그걸 강제로 마시게 했다.
- 피해자의 얼굴을 돌려 차고 쓰러지면 강제로 일으켜 다시 차는 행위를 반복하였는데 이때 피해자가 넘어지면서 물건에 부딪혀 경련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피해자가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진 피해자를 계속 폭행하였다. 이때 피해자는 코피를 흘리고 화상을 입어 생긴 고름이 터져 피가 사방에 튀겨졌다.
- 가해자들은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비닐봉지로 손을 감싼 뒤 피해자의 전신을 마구 폭행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1.74kg 운동 기구로도 폭행한 뒤 소년 D가 이 기구를 어깨 높이에서 피해자의 복부에 2~3회 떨어트렸다.
- 소년 A는 반복적으로 기름을 피해자의 허벅지 등에 붓고 불을 붙였는데 피해자는 처음에는 손으로 불을 끄려는 등 저항을 하였지만 이윽고 반응이 거의 없었고 축 늘어져 쓰러졌다.
- 이러한 폭행은 피해자가 사망한 날 당일 오전 8시경부터 10시경까지 약 2시간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졌고 결국 피해자는 숨을 거두었다.
부검 결과와 사인
준코의 사인은 구타에 의한 외상성 쇼크와 위의 토사물에 의한 질식사로 추정되었다.
인터넷에 준코의 시신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들은 대부분 해당 사건을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에 나온 장면이고 실제 시신은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부검 당시 기록은 아래와 같다.
- 양손 양발, 갈비뼈 등 전신의 뼈가 골절되어 있었다.
- 시신의 손발이 묶여있는 상태였다. 얼굴은 눈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는데, 하반신은 얼굴보다 훨씬 더 참담한 상태였다. 온몸의 근육은 폭행과 화상 등으로 흐물흐물하게 녹아 있었고 고름과 진물이 흘러 범벅이 되어 있었다.
- 얼굴의 뼈의 상당 부분이 으스러져 있었고 가슴에 빈틈이 없이 바늘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으며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카락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 새끼손가락의 손톱이 뜯겨져 있었고, 왼쪽 유두는 펜치로 집혀 심하게 손상된 상태였으며 잇몸에는 제대로 배열된 치아가 하나도 없었고, 생니가 강제로 발치된 흔적도 있었다.
-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탓에 아예 뇌가 축소되어 녹아 있는 상태였다. 코는 피와 고름으로 꽉 막혀 입으로 호흡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막도 심하게 파열됐기에 마지막엔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너무나 가공할 고통 속에서 입술을 깨물어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모두 절단되어 있었다.
- 피하 지방의 두께는 평균치의 100분의 6이 채 되지 않아 극도의 영양실조 상태였다. 원래 체중인 53kg에서 36kg으로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준코의 키가 165cm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저체중이다.
- 준코의 위장에선 지네와 바퀴벌레, 다량의 먼지와 쓰레기, 본인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소변과 대변, 어마어마한 양의 정액, 페트병 등 차마 말로 꺼내기도 힘든 것들이 발견됐다. 성기에는 비타민 음료 병 2개가 꽂혀 있었다. 준코의 몸 아래 쪽에 있는 장기들의 상태는 두 배로 심각했다. 대장은 너무나 큰 화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그 외의 기관들의 상태도 전부 정상이 아니었다.
- 셀 수 없는 횟수의 강간으로 인해 준코는 임신한 상태였다.
만약 그녀가 사망하기 전에 구출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준코의 전신에 입은 화상과 전신의 뼈 골절, 온몸의 근육과 치아 전체 손상, 장기 외상과 화상, 스트레스성 전체 탈모, 극도의 영양실조 상태 등을 치료하기도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무엇보다 외상뿐만 아니라 극심한 후유증과 트라우마, 정신질환 등으로 인해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준코는 임신한 상태였지만 낙태도, 출산도 하기 어려웠을 상태로 추측된다.
사망 당시부터 심각하게 손상되어 안면이 심하게 함몰 및 변형되어 있었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시신이 부패되었던 터라 외관만으로는 사인을 비롯한 신원 확인조차 쉽지 않았지만 손상된 시신에 남아 있던 지문과 치열을 조합하고 머리카락의 DNA 등을 검사한 결과, 1988년 11월 25일 밤에 아르바이트 후 귀가 도중에 행방불명된 사이타마현 미사토시 타카스 1번지에 거주했으며 현립 야시오 미나미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당시 17세의 후루타 준코임이 확인되었다.
시신 발견 당시, 온갖 사건 현장과 시신들을 봐온 베테랑 형사들조차 구토하며 기절하거나 오열할 정도로, 이 세상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잔인한 상태였던 준코의 시신은 과연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을 정도로 굉장히 참혹한 상태였다고 한다. 준코가 감금되고 목숨을 잃은 방에선 벗겨진 그녀의 속옷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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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측 및 관련인
준코의 부모님은 당시 준코가 야시오시 시내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뒤 귀가하지 않자,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냈다. 준코가 무사히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렸으며 일을 쉬어 가면서까지 준코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실종된 지 4개월이 넘어서야 겨우 찾은 준코는 납치되어 각종 폭행과 온갖 고문에 시달리다 고통스럽게 죽어있었고, 준코의 부모님은 이미 사망한 것도 모자라 참혹하게 변해버린 준코의 시신을 마주해야 했다.
심각하게 훼손되고 부패된 딸의 시체를 본 준코의 어머니는 극심한 충격으로 인해 정신과에 다니게 되었다고 하는데, 한동안 준코의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그것도 모자라 세간의 시선에 시달려야 했는데 재판 당시 준코의 아버지 후루타 아키라(古田晃)는 "가는 곳마다, 지인들이나 모르는 사람들이 죽은 딸의 이야기를 집요하게 물으면서 물고 늘어지며 괴롭힌다"라고 통탄했다. 특히 "지인들은 질문하고 나서 위로라도 해줬지만, 기자들과 다른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면서 한탄했다.
준 짱, 어서 오세요.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팠죠? 괴로웠죠? 아무것도 모르고 생활했던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언제나 온화하고 밝았던 준 짱. 문화제 때 모두와 만든 핫피(일본 전통 축제 의상)는 정말 잘 어울렸었죠.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저희는 준 짱의 죽음을 절대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끔찍한 범죄가 없어진 평화로운 날을 보낼 수 있도록, 사회인이 된 저희들도 노력하겠습니다. 또 괴로운 일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갔던 준 짱을 생각하며 힘내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이 특별히 졸업장을 들고 와주셨다고 하네요. 이로써 3학년 8반 47명은 전원 졸업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준 짱… 이제 고통도 괴로움도 없어요. 편히 잠드세요. 잘 가, 준 짱. 야시오미나미고교 3학년 8반 일동.
준코의 장례식은 학교 친구들, 가족,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4월 2일 일요일에 준코의 집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 이 장례식에는 기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원래 일본식 장례식은 고별식을 마치고 화장을 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시신의 상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부검이 끝나자마자 바로 화장을 하고 장례식을 시작했다.
준코의 묘지는 한번 유즈루의 부모에게 훼손된 후 다른 곳으로 이장했고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추도사는 준코의 친구인 미야시타 카나(宮下佳奈) 학생이 읽었다.
그리고 4월 초에 야시오 미나미 고등학교에선 준코가 돌아오리라 믿고 보관해 두고 있었던 졸업장을 그녀가 살던 집으로 보내줬다.
가해자 측 및 관련인
자식이 저지른 범죄를 알게 된 히로시의 부모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집과 자산을 정리해 5천만 엔을 준코의 부모에게 건넸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돈을 받으면 법적으로는 '합의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합의금 성격이라 정말로 법적으로 강한 처벌을 원한다면 받아서는 안 된다.
당시는 물론 현재도 상당히 큰 액수이지만, 이미 딸을 잃은 피해자 가족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히로시의 부모로서는 사죄를 할 방법이 그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사죄하고 싶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준코의 유가족에게 거절당했지만, 다른 가해자 가족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사과와 위로를 하고 용서를 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가해자 가족 중 그나마 정상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히로시의 부모는 이후 이혼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즈루의 부모는 참으로 그 자식에 그 부모란 면모를 대놓고 드러냈다. 어머니 오구라 에츠코는 자식이 전과자가 된 것에 분노해서 "이게 다 준코 때문이다" 라고 말하며 준코의 묘를 찾아가 부숴버리는 충격적인 짓을 저질렀다. 유즈루의 부모는 이 사건 이전부터 유즈루의 아버지의 혼외정사로 인해 별거 중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이혼했다. 유즈루의 아버지는 사과하기는커녕 "노코멘트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준코가 죽은 지 35년이나 지난 후에도 여전히 조롱이라도 하듯 버젓이 사건 발생지 인근에 음식점을 차리는 등의 행태를 일삼으며 준코를 모욕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유즈루의 부모가 유족에게 지급한 위자료는 50만 엔 정도로 매우 적었지만, 사건 후 곧바로 아파를 구입하고, 유즈루에게 고급차를 사주는 등 유족에게 지불해야 할 돈을 자기 가족의 사리사욕을 위해서만 사용하였다. 유즈루의 부모는 사건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즈루의 어머니는 언론이나 이웃을 피해 차 안에서 생활하기도 했다고 한다.
준코가 감금된 장소를 제공한 미나토 신지의 부모는 "여학생이 2층에 있는 걸 내내 알고 있었으며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그나마 제일 회유하고 노력했지만 아들이 두려워 어쩌지 못했고 한 번 돌려보낸 이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했기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라고 진술했다. 그런데 사건이 밝혀지고 증거 확보를 위해 경찰관들이 들이닥쳤을 때 방의 바닥과 커튼, 베란다 벽 등이 모두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어머니가 깨끗하게 청소해서 집안엔 어떠한 증거도 안 남은 상태였다. 진짜로 몰랐을까?라는 의심이 드는 부분.
당시 미야노 히로시와 약혼을 하고 동거를 하던 야스시의 누나는 "후루타 준코가 그 집에 감금되어 있다는 걸 내가 알았더라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구출했을 것이다. 나는 전혀 몰랐다."라고 말했다고 하며 끝내 파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