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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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동 대공분실




장안동 대공분실




개요

대공분실(對共分室)은 경찰청 보안국이 설치했던 기관을 말한다. 보안분실(保安分室)이라고도 부른다. 유사 기구로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인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설치 당시 목적은 북한의 남파간첩과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을 취조하고 심문하기 위한 것이지만 정작 대중들에게는 군사독재 시절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린 사람들을 이곳으로 연행해(필요하다면 추가 혐의까지 추가해) 당사자가 죄를 자백하거나 인정할 때까지 각종 고문을 자행해 심신을 반신불수로 만들거나 죽여서 내보내던 곳으로 유명하다.

서울 남영동의 대공분실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뀌었다.

현실

설립 목적은 남파공작원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취조하여 가려내는 것이지만 국가보안법을 전가의 보도로 휘두른 군사독재 시절에는 헌법상 보장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하거나 정권 입장에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던 악명높은 장소로, 검거된 사람들은 국민들과 언론의 관심이 차단된 밀실에서 엄청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보기관, 군 수사기관, 대공분실 외에 특수수사대 분실과 일반 경찰서 형사과 및 파출소에서도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고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군 수사기관의 경우 대통령 암살사건의 주동자급 가해자가 조사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 일반 경찰서 형사과와 파출소의 예를 들면 연행된 사람이 여자라면 성고문까지 했었고, 민주화 운동가가 빨갱이로 몰리는 것 말고도 연쇄살인사건이 터졌으면 증거가 없는 엉뚱한 용의자가 살인범으로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간첩조작 사건이 터질 시 일가 친척까지 불고지죄로 줄줄이 끌려와 고문을 당했다. 심지어 1983년에 섬유업과 관련된 대기업 이사가 특수수사대 요원들에게 고문을 당하다 죽기도 했으며 박종철을 고문하다 죽인 수사관도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특수수사대 요원에게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경찰서들과는 달리 간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지도에서도 나와있지 않다. 지번도에서도 정식 명칭은 나와있지 않고 번지수만 나와 있거나 위장명칭, 위장상호가 적혀있다. △△상사, □□산업 등으로 되어있고, 어린이집 명칭이 달린 곳도 있다. 이름 그대로 되어 있는 곳을 보고 일반 회사인 줄로 아는 사람도 있었다. 관련기사 또 소속 경찰관끼리 정식 계급을 붙이지 않고 ☆☆계장님, ○○사장님 식으로 말한다. 물론 굳이 위장을 할 필요가 없는 일부 안보수사대는 청사 내에 태극기를 상시 게양해 간판은 없더라도 최소한 공공청사임을 알 수 있게 해놓는다. 심지어 어떤 곳은 경찰 깃발도 게양해 놓는 곳도 있다.

군사독재 시기에 고문을 가해서 빨갱이로 몰았었던 과거사와 폐쇄적인 환경에 따른 인권침해 이유로 폐지해야 한다거나, 반대로 남북 대치 상황이라 존속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있는데, 솔직히 지금 와서 굳이 따로 저런 걸 만들어 세울 이유는 없기는 하다. 워낙 정보가 빠른 시대라 저렇게 간판 뗀다고 해서 보안이 되는 시기도 아니거니와, 정작 중요한 보안성은 저런 곳보다는 차라리 국가정보원이나 경찰청사의 으슥한 곳으로 정보공개만 하지 않고 정식 절차대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 요즘은 일반 절차대로 수사해도 워낙 감시·검열·차단 자체가 용이한 시대라 별 문제가 없다. 옛날에 뭘 몰래 수작질해서 사보타주 할 수 있던 시대에나 작당모의해서 경찰서 터트리고 수송차량 박살내고 하는 게 가능하다.

간판도 달지 않고 그나마 몇몇 있던 곳도 간판을 뗀 상황인데, 2015년 간판 30개를 다는 데 3억여 원이 넘는 예산을 신청해 논란이 되고 있다. 간판 1개당 천만 원 수준이다. 관련 기사

2023년 9월 20일 홍제동 대공분실이 대공 수사 전담 조직을 위한 사무실로 지정된 사실이 드러나 큰 충격을 주고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시대퇴행 행태적 행정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목록

2012년 2월 17일 백재현 민주통합당 의원의 요청으로 경찰청이 공개한 전국 보안수사대는 아래의 표와 같다. 부산경찰청, 대구경찰청은 별도의 보안분실을 조성하지 않고 본청 내에서 수사하며 광주경찰청은 본청은 아니지만 광주남부경찰서안에 안보수사대의 사무실이 있다. 이후에 상세 위치 및 현황에 대해 재공개하지 않았기에 폐쇄된 곳도 있을 수 있다. 2012년 한겨레 기사 2018년 더팩트 기사

본청/지방청 실제 명칭 소재지 건축 시기 지도상 명칭
경찰청 안보수사1·2·3대

(경찰청 세검정로 별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세검정로 90-15 (홍제동) 충의회중앙회
서울경찰청 안보수사1·2·3·4·5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8길 31(내자동) 서울경찰청
안보수사6대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19길 18-6 2021년 개축 자하문로별관(과거 부국상사)
안보수사2대[이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장한로12길 62 장한로별관(과거 경동산업)
안보수사3대[이전]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로13길 20 신정로별관(과거 치안연구소)
안보수사4대[이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성산로 494-18 성산로별관
인천광역시경찰청 안보수사1·2·3대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서로105번길 21 (만수동) 인천광역시경찰청 광역수사대
경기도남부경찰청 안보수사1·2·3·4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금당로 71 (조원동) 경기도남부경찰청 광역수사대
경기북부경찰청 안보수사1대 경기도 의정부시 경의로177번길 6 (신곡동) 만복교회
안보수사2대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강성로 43
대구경찰청 안보수사1·2대 대구광역시 남구 앞산순환로 367 (대명동) 폐지
울산경찰청 안보수사2대 울산광역시 중구 구교로 72 (학성동) 1989년 중구 태화동에서 옮김.
경북경찰청 안보수사1대 경상북도 경산시 계양동 경산경찰서
안보수사2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용흥동
안보수사3대 경상북도 구미시 원남로2길 24 (남통동) 경북경찰청 구미원남로별관
경남경찰청 안보수사1대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비음로55번길 18-21 (사파동)
안보수사2대 경상남도 진주시 대신로 614-28 (초전동)
안보수사3대
대전경찰청 안보수사1·2대 대전광역시 중구 대종로35번길 32 (옥계동) 폐쇄추정
충북경찰청 안보수사1·2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단재로 361 (방서동)[23]
충남경찰청 안보수사1·2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목천안터2길 18 (신계리) 흑성산업
광주경찰청 안보수사1·2대 광주광역시 남구 용대로74번안길 9-5 (봉선동) 광주남부경찰서
전북경찰청 첨단안보수사계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 #
전남경찰청 안보수사1대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로 89 (온금동)
안보수사2대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동산길 16-7
강원경찰청 안보수사1·2대 강원도 춘천시 효자로73번길 4 (효자동) 강원경찰청 효자로 별관
안보수사3대 강원도 강릉시 경강로 2590 (견소동) 영동물산
제주경찰청 안보수사1·2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516로 2927 제주지방경찰학교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남영동 5층 구석방에서의 23일, 이것은 지옥이었다. 독가스 대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였다. 시간이 종국적으로 멈춰 버린 영원한 저주의 세계였다."


김근태

이 문서의 첫 사진으로 나와있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71길 37(갈월동)에 소재하며, 경찰청 보안3과로 사용되던 곳으로써, 1976년 당시 내무부장관 김치열이 발주하여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설계, 건축되었다.

2005년 7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였다.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건물 운영권을 이전했으며, 경찰청 인권센터는 이태원의 구 정보분실로 이전했다. 민주화 운동가를 고문하던 곳으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기도 하다. 영화 1987에서는 부국해양연구소라는 명칭으로 나왔다. 다른 대공분실과 돌려 쓰던 위장명칭 중 하나인 '부국상사'와 적절히 섞은 것으로 보인다.

남영동 대공분실 설계도면

이 건물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의 철두철미할 정도로 발주자의 요구사항을 맞춘 치밀한 설계로 악명이 높다. 외관을 얼핏 보면 김수근 특유의 벽돌 기법과 입구 전이 공간을 지닌 것이 상당히 멋들어진데 반해, 내부 구조는 거의 마음 놓고 고문하기 좋게 되어있다는 설이 유력한 사실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다양하고 치밀한 기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걸작 고문시설이다. 건물의 특징적인 사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직원이 사용하는 정문으로 통하는 일반 계단과 수용자를 들일 때 사용하는 건물 뒤의 쪽문이 따로 존재한다.
  • 수용계단이 나선형의 어둡고 좁은 원형의 철제 계단으로 되어있고, 다른 층을 통하지 않고 수용자를 뒷문에서 조사실로 곧바로 데려가는 방식이다. 계단 층수 표시도 없다. 얼굴에 검은 포대자루 같은 것이 씌워지고 몸은 밧줄로 묶인 채로 끌려가는 조사 대상자들은 자연스럽게 방향 감각과 고도 감각을 상실한다. 당시 근무하던 경찰의 증언으로는 이 계단은 끌고 가던 사람들도 불편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중앙 계단을 썼다고 한다. 혼자 올라가더라도 부주의하면 넘어질 위험이 있을 정도다. 공간이 협소하고 경사가 급해 아래에서는 누가 붙들려 올라가는지 알기 어렵다. 이 원형 계단은 1층 쪽문 출입구에서 취조실이 있는 5층의 복도로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 본래는 5층 건물인데, 증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인 7층이 되었다.
  •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비상구나 통로 문도 다른 취조실과 똑같은 모양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빠져나가는 길을 찾기 어렵게 해서 조사받는 사람이 쉽게 탈출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 5층 조사실 복도 끝에 거진 80~90도 경사의 철제 계단이 하나 더 있는데, 1층 정문 옆으로 이어져 긴급 상황 발생 시 경찰 탈출용으로 추측된다. 낮에 봐도 정말 소름끼친다.
  • 방마다 문을 엇갈리게 설치했다. 설계도를 보면 알겠지만 문이 열렸을 때 보이는 것은 벽면뿐이다. 고문당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마주쳐서 연락을 주고 받는 상황을 방지하며, 건축적으로 시각적인 불안정을 야기시켜 공포감을 부추기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각된다.
  • 복도의 천장이 높아 구두굽 소리가 크게 울려퍼진다.
  • 조사실의 벽이 흡음판으로 도배되어 있어 조사실 내에서 들리는 고문 소리와 신음 소리가 외부로 전달되지 않는다. 특히 이 흡음판은 4층과 5층에만 설치하도록 했다. 고문 등으로 인해 5층 조사실에서 발생할 소음이 다른 층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미리 조처한 것이다. 그렇지만 흡음판 또한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일부러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하지 못하는 ‘목재 타공판’을 사용했는데, 목재 타공판이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 새어나간 비명소리는 낮고 음산한 소음이 되어 반대편 벽면으로 전달되곤 했다.
  • 조사실의 문에는 보통 집의 현관문과 마찬가지로 외시경이 달려있는데, 일반적인 외시경과는 다르게 반대 방항으로 설치되어 문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구조다.
  • 조사실 내부의 전등을 켜고 끌 수 있는 전등 스위치는 조사실 밖에 설치되어 있다. 철저히 통제자 위주의 구조이다.
  • 조사실 전등에는 특정한 형태의 철제 덮개를 반드시 씌우고, 전등갓의 외면은 은회색 멜라민 코팅, 반사면은 백색 멜라민 코팅으로 해야 한다고 설계도 상에 일일이 지정했다. 외부 충격으로 전구가 깨질 것에 대비함과 동시에, 집중 조명을 연출하기 위한 목적이다.
  • 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밖에서 보이지 않게 세로로 길고 좁은 창문으로 되어있는 것이 전부 고문실 창문이다. 창의 폭이 불과 20cm 정도에 불과한데, 창문 유리를 깨더라도 사람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을 뿐만 아니라, 채광량 자체도 적어 조사받는 사람의 공포감이 극대화된다.
  • 취조실에 샤워기욕조가 설치되어 있는데, 당연히 물고문을 위한 용도로 쓰인다. 준공된 1976년에는 일반 가정집에 욕조와 샤워기가 결코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욕실이나 화장실 용도로 별도로 마련된 공간이 아닌, 철문으로 폐쇄된 방방마다 욕조와 샤워기가 모조리 배치되어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즉 오로지 물고문을 목적으로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한국 건축계는 김수근의 작품 중에서 이 대공분실의 언급을 최대한 피하고 있다. 다만 고객(독재정권)에게서 의뢰를 받고 건물을 설계하면서 이 건물을 이용할 사람들과 그들의 목적을 고려한 거장 건축가적인 탁월한 판단은, 그가 명실상부 당대 한국 건축계의 최고 거장이었음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재 정부의 업적 과시를 위한 건축을 도맡아 명성을 쌓은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권력이 인간을 향해 폭력을 행하는 공간의 주목적까지 생각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는 것은 직업윤리와 인간적인 양심이 거의 파탄난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혹자는 김수근이 살던 시대는 반대자들에게 억압을 하던 시대로 고문도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독재정부까지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던 수사방식이었기에, 그를 비판하는 것도 오늘날 인권이 보장받는 시점에서 평가하는 시각이며, 오히려 그 당시에는 대공분실이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수감자를 고문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을 것이라고는 본인도 몰랐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김수근의 공간 사무소에서 일한 바 있는 건축가 승효상은 "김수근 선생이 설마 사람을 고문할 용도인 줄 알고 설계를 맡았겠느냐"며 선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당시 김수근은 단순한 일개 건축가가 아니라, 문화예술계의 대표적 후원자이자 당대의 유명인이었으며, 건축계의 '큰 손'이기도 했다. 골방에 틀어박혀서 설계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김수근이 1961년에 자신의 건축 사무소를 차리고 독립한 이후로 그의 건축 사무소에 매년 서울대 건축과 출신의 전도유망한 건축학도들이 줄줄이 입사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특히 1974년부터는 국민대학교에서 건축과 교수로 재임하며 10월 유신과 유신 반대 투쟁을 대학 학내에서 목격했다. 특히 1979년부터는 국민대학교 조형대학의 학장으로 재임하며 서울의 봄과 12·12 군사반란을 비롯한 여러 역사적 사건을 모두 가까이에서 경험했음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가 대공분실에서 고문이 행해지는 것을 전혀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를 시대적 상황도 전혀 모르고 살던 바보 취급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특히 김수근은 설계도와 설계도상의 시방서를 꼼꼼하게 작성하기로 유명했는데, 끔찍한 고문을 위해 준비된 이 모든 구조와 장치들이 설계 단계에서부터 그의 손에서 치밀하게 기획됐다. 각 취조실마다 배치된 물고문용 욕조의 위치와 크기 하나하나 까지도.

몇 가지 고문 관련 사건은 1985년 이근안 등 경관 5명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김근태를 칠성판에 묶고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가한 사건과 1987년 박종철이 물고문을 당해 죽은 사건이 있다. 저 위에 박종철이 고문당한 방의 사진을 보면 조사실이라는 공간에 욕조와 샤워기가 있다. 그런데도 1988년에 치안본부의 모 대공차장은 대공분실에 욕조를 설치한 이유는 조사받는 사람이 목욕하기 위한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으며 이것은 망언에 가깝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이지만 정작 위치는 남영동이 아닌 갈월동인데,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근처에 남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 쪽도 마찬가지로 소재지는 갈월동. 지금도 남영역 플렛폼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을 볼 수 있다. 특히 대공분실 존속 시절에 '남영역에서 평소처럼 지하철을 기다리는 일반 시민과 대공분실에서 고문받는 시국사범'이라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에는 상술했듯이 경찰청 인권보호센터가 2018년까지 들어섰는데, 이는 과거 경찰이 행했던 과거를 반성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6월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조성하겠다는 뜻을 밝힘에 따라 경찰청의 대공분실 소유·관리 역할은 2018년 12월부로 종료되었다. 경찰 측이 인권센터를 한남동으로 이전하고 2018년 12월 26일에 이 건물을 경찰청의 상위 조직인 행정안전부에 넘겼다. 행정안전부는 향후 민주인권기념관을 조성해 기념관 관리 권한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맡기게 된다.

해당 건물 리모델링을 통해 2019년 5월 민주인권기념관이 조성되었으며 추후 2024년까지 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관련 토론회를 여기서 개최하기도 하는 등 민주인권이라는 표현에 맞는 여러 행사를 진행하였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고 폐쇄된 상태이다.

기타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캠퍼스에 있는 클럽 이름도 대공분실인데, 해당 캠퍼스가 옛 국가안전기획부 해외파트 건물이 있던 자리여서 그렇게 지어진 듯하다. 이 때문에 귀신을 목격했다는 학생들의 괴담이 속출하기도 했다. 이쪽은 약칭 DGBS라고도 하는데, 이 약칭은 과거 조선펑크의 산실이었던 홍대거리 공연장 드럭(크라잉넛도 여기 출신)의 리스펙트를 겸하는 듯하다. 홍대거리 드럭은 보통 DGBD로 줄인 영칭이 있었다. 이쪽 대공분실에서는 주로 방송에 나온 적이 없거나 특성상 나오기가 힘든 사회파적 비주류 인디밴드의 공연들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2010년대 말 이후로는 인디밴드의 활동도 줄어들었고 이따금 Lost Air라는 단체가 DJ 공연이나 하는 듯하다.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당시 대공분실 수사관 중 한 명의 진술을 언급했는데 이곳에 한 번 들어온 자들은 똥물을 뱉어낼 때까지 패야한다라는 말이다. 아예 죽도록 패버려서 그에 대한 공포로 대공분실의 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 그러나 1987년 이런 가혹한 폭력으로 한 수감자가 죽게 되고 그로 인해 이 대공분실의 진실이 밝혀지게 되면서 진실을 숨길 수 있을거란 이들의 생각은 완벽히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