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개요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중에서
종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가 화장한 박종철의 유해를 임진강에 뿌리며 한 말. 이후 장례식장과 시민들이 박종철을 추모할 때 쓰는 구호가 되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3학년 학생 박종철이 경찰에게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각종 고문을 받다가 사망한 사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전개
박종철의 사망
1986년 10.28 건국대학교 항쟁 진압 후 전두환 정권은 '반제동맹당 사건'과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결성기도 사건 등 공안조작 사건들을 발표하면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사건 발생 전날인 1987년 1월 13일 김종호 내무부장관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격려 방문하여 당시 진행 중이던 공안사건 수사에 속도를 내도록 압박했고 1월 14일 경찰은 피해자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경찰 대공수사관들은 1985년 10월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의 소재를 추궁했고 박종철은 모른다고 했다. 이에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옷을 모두 벗기고 조사실 안에 있는 욕조로 끌고 가 물고문을 반복했다. 그래도 모른다고 하자 결박당한 두 다리를 들어올려 또 다시 물고문을 가했고 고문 도중 욕조의 턱에 목 부분이 눌리면서 결국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인해 의식을 잃었다. 경찰 측이 부랴부랴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의 의사 오연상 박사를 불러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는데 의사의 언론 증언에 의하면 "사건 현장에 물이 흥건했다"고 한다. 수사관들은 박종철을 대공분실 부근의 용산 중앙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하려고 시도했지만 박종철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사망을 최초 확인한 오연상 당시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 내분비내과 전임강사가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당시 우연찮게도 왕진이 가능한 내과의사는 나뿐이었고, 박종철은 (그러지 않고서야 왕진 요청이 올 일이 없었기에) 우연의 일치로 왕진 요청 전에는 살아 있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정황상 불필요한 가혹행위가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상태였지만 일단 바로 사망 선고를 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심폐소생술을 약 1시간 동안 진행했고 이후 경찰은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이에 오연상은 '용산병원으로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형사들에게 "미리 준비를 위해 응급실에 전화해야 한다"고 말했고 경황이 없던 수사관들은 그냥 전화를 허락했다. 오연상은 응급실에 전화하여 "이 환자는 병원으로 가면 안 된다, 응급실장이 막아달라"고 전했고 응급실장 뿐 아니라 당시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장 진료부장 등이 총동원되어 '죽은 사람은 받을 수 없다'는 병원의 규정을 동원해 박종철의 시신의 내원을 막아 시신은 국립경찰병원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하마터면 고문치사 사건이 의료사고로 둔갑하여 은폐될 뻔할 수도 있었던 국면이었다.
형사들은 오연상에게 "사망진단서를 써 달라"고 했지만 오연상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사망진단서 대신 사체검안서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이때 "환자의 사인을 모르기에 미상으로 썼고 부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했는데 경찰은 받아들였다. 이후 이 사실을 동아일보 기자 윤상삼에게 전달하였고 오연상은 검찰에서 조사는 많이 받았으나 이미 신군부와 대공분실의 손을 떠났기에 그들은 오연상에게 손을 댈 수 없었고 이 틈을 노린 오연상은 휴가를 내고 잠적했다.
경찰은 박종철이 병원에서 숨진 것으로 조작하려고 했으나 중앙일보 서울지검 출입기자 신성호가 소식을 듣고 곧바로 데스크에 보고하여 그날 2단짜리 꼭지에 기사가 들어갔다. 이날 기사는 "학생이 남영동에서 죽었다"는 단신이었고 1면도 아니고 사회면 한구석에 있었는데 석간 강판 이후 신문이 배포되자 모든 신문사에서 중앙일보에 전화를 걸어 진위를 물었다. 이후 문공부는 중앙일보에 난입하여 깽판을 치고 갔다.
이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5.18 민주화운동 7주기 기념 미사에서 내막을 폭로하는 바람에 은폐는 무위로 돌아갔고 파문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 경찰에서는 서둘러 조한경, 강진규 2명이 박종철을 취조하던 중 사망했다고 이 사건에 관하여 축소 은폐 보도를 하였다. 그러고는 증거를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신을 화장하려고 서울지방검찰청에 시신 화장 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가해자들은 조한경, 강진규,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5명이다. 왼쪽 팔을 황정웅, 오른쪽 팔을 반금곤, 다리는 강진규가 잡았고 이정호가 박종철의 머리를 욕조에 담갔으며 조한경은 고문을 지휘했다.
검경의 대립과 부검
어제 낮 12시쯤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21살 박종철 군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다가 숨졌습니다. 숨진 박 군은 서울대 민민투 책임자로서 수배 중인 사회복지학과 박종운 군을 숨겨준 혐의로 어제 오전 경찰에 연행됐었습니다. 지금까지 간추린 뉴스였습니다.
신경민 MBC 기자의 멘션
… 이어 10시 50분쯤부터 수사관의 심문을 받기 시작, 11시 20분쯤 수사관이 수배된 박모 군(서울대생)의 소재를 물으며 책상을 세게 두드리는 순간 의자에 앉은 채 갑자기 '윽' 하는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1987년 1월 16일
신성호의 취재를 통해 1월 15일 중앙일보 사회면에 최초로 보도되었고 이후 기자들이 사실 확인을 위해 달려들었다. 이에 치안본부장 강민창(1933 ~ 2018)은 박종철의 사망 원인에 대해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고 거짓 시인을 하는 바람에 이것이 정식 사인으로 언론에 발표되었다.
당시 발표문에 따르면 박종철은 1월 14일 아침 8시 10분경에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되어 9시 16분경 아침식사로 나온 밥과 콩나물국을 조금 먹다가 입맛이 없다면서 냉수를 몇 잔 마신 뒤 10시 15분경부터 박종운 소재에 대하여 심문 도중에 수사관이 책상을 치자 박종철이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정오 즈음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어 강민창은 "내가 아는 한 가혹행위는 없었다"며 "먼저 가족들에게 경찰이 결백하다는 걸 납득시키고 부검 결과가 나오면 나중에 떳떳이 전모를 밝히겠다"고 하여 "박 군을 처음 본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오연상을 지칭)가 박 군이 쇼크사로 숨진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물론 훗날 밝혀진 사인은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 더 정확히는 물에 의하여 익사한 것이 아닌 물고문 와중에 목이 욕조 턱에 눌리면서 질식사한 것. 이걸 수습한다고 신임 내무부장관 정호용이 한 말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였다. 이걸 해명이라고 들은 여론이 들끓어 올랐다. 이 정호용의 발언이 웃긴 게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부대의 최고위직인 특전사령관이 바로 이 정호용인데 그런 사람이 "사람을 어찌 치냐"고 했으니 굉장한 블랙 코미디일 수밖에.
발표 전날인 15일부터 밤 9시 5분부터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검사 최환, 형사부 검사 안상수 등의 지휘 하에 부검의 황적준이 부검한 끝에 박종철이 고문의 의한 경부 압박 질식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다음 날 강민창은 위와 동일한 기자회견에서 "부검 결과 사체 외표검사에서 박종철의 왼쪽 무릎에 0.6cm의 찰과상이 있었고, 오른손 엄지, 검지 사이에 손등쪽에 작은 멍이 있었고, 내시경 검사 결과 오른쪽 폐에 탁구공만한 출혈반이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강민창은 "황적준이 '출혈반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전기 충격요법 및 인공호흡을 해도 생길 수 있으며, 특별한 치명상은 발견이 안 되었지만 목과 가슴 부위에 피멍이 있었다'고 말했다"면서 "부검 결과가 나오는 즉시 수사관들을 조사해 잘못이 드러날 시 엄중 처리하겠다"고 밝혔지만 고문 사실은 부인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발표는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내과 의사 오연상에 의해 거짓으로 밝혀졌다. 그의 발표에 따르면 박종철은 병원에 옮기던 때에 사망한 게 아니라 사건 당일인 14일 오전 11시 45분경에 이송 당시 사망한 상태였으며 자신이 도착했을 때 박종철의 복부는 부푼 상태였고 청진기 진단 결과 복부 등 몸 속에 '꼬르륵'하는 물 소리가 났는데 쇼크사는 심장마비 뒤에 호흡곤란이 생기므로 쇼크사는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또 그는 자신이 도착할 적 조사실 바닥에 물기가 있었고 자신은 진료가 아닌 사체 검안서를 썼다고 밝혔다.
결국 위와 같은 사건으로 전국민적으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
당시 대검 공안부 최환 부장검사가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진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한 것도 진상을 밝히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최환 부장검사 지휘대로 소견서를 받고 실무를 처리한 것이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박종철기념사업회 측은 이를 부정한다.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섰던 것은 최환 검사였고 안상수 전 대표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건 은폐를 일삼았다는 것. (2011년 3월 시사인 기사) 여하간 그는 1996년까지 한겨레 등에 기고하는 등 인권 변호사로서 이름을 남겼으며 이후에도 간간히 책을 내고 있다.
사실 검찰이 부검을 강행한 데는 경찰에 대한 악감정이 한몫 했다는 주장이 있다. 박종철 사건이 발생하기 6개월 전에 발생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당시 검찰은 경찰의 요청에 따라 사건을 은폐해야 했다. 지금 경찰과 검찰의 관계를 보던 사람들이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만 5공 시절에는 경찰이 검찰보다 힘이 셌다. 군사독재정권이 15만명이 넘는 거대한 준군사조직인 경찰을 이용하여 사회를 통제하는 공안통치를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여전히 수사지휘권은 검찰에 있었지만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이 그랬듯이 법이 정직해 봐야 권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은 일선에서 직접 반정부 세력인 운동권을 때려잡는 경찰을 훨씬 총애했고 검찰은 경찰이 송치한 사건을 뒤치다꺼리하는 수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는 국가안전기획부가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서 경찰, 검찰, 교정기관 등 모든 사정기관을 배후조종하고 있었다. 또 경찰은 검찰과는 달리 산하 외청으로 독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경찰의 총수는 내부 인사인 치안본부장이 아니라 내무부 장관이었다. 때문에 정권 실세가 내무부 장관 자리에 앉아 입맛에 맞게 경찰 조직을 움직일 수 있었고 경찰도 정권을 등 뒤에 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후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국가안전기획부가 국가정보원으로 개칭되면서 정보기관의 노골적인 정치개입과 검찰에 대한 통제가 크게 줄면서 생긴 권력의 공백을 검찰이 치고 들어가면서 검찰권력이 현재처럼 비대해졌다. 3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보면 이 관계가 묘하게 어느 정도 역전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무튼 검찰 입장에서는 성고문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경찰 뜻대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욕은 자기들이 다 먹었다는 분노가 일어난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분노가 박종철 사건에서의 부검 강행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주장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환이다. (...)
언론 보도
이 사건의 최초 보도는 중앙일보 1987년 1월 15일자 사회면에서 나온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하의 2단짜리 기사였다.
경찰에서 조사 받던 대학생 '쇼크死'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 군(21·서울대 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중이다. 학교 측은 박군이 3∼4일 전 학과 연구실에 잠시 들렀다가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고 밝혔다.
한편 부산시 청학동 341의 31 박군 집에는 박군의 사망 소식을 14일 부산 시경으로부터 통고받은 아버지 박정기씨(57·청학양수장고용원) 등 가족들이 모두 상경하고 비어있었다.
박군의 누나 박은숙 씨(24)는 지난해 여름방학 때부터 박군이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 최근 무슨 사건으로 언제 경찰에 연행됐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박군은 부산 토성국교·영산남중·혜광고교를 거쳤으며 아버지의 월수입 20만원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형편이다.
이게 어떻게 알려졌는가 하면 신성호 기자가 취재거리를 찾기 위해 검사실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검찰청 직원이 "경찰들 큰 일이야"라고 운을 뗐고 사건의 냄새를 직감한 기자가 그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척 말에 맞장구를 쳐서 내용을 빼냈다고 한다. 자세한 비화는 이렇다.(출처: 박선욱 씨의 글)
1987년 1월 15일 아침, 대검찰청 공안4과장 이홍규는 실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공안부장 티타임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 아침 대학생이 경찰 수사를 받다가 죽었다는군.” “네? 그게 정말인가요?” “이 일은 절대 외부에 발설하면 안 돼. 다들 입 조심해!” 공안부장은 팀원들에게 단단히 함구령을 내렸다. 참석자들은 모두 가슴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매단 듯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매일 회의를 겸해 차를 마시는 이 시간은, 지나간 여느 날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날만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속도감과 아득함을 동시에 느꼈다. 티타임이 끝난 뒤, 10층 사무실로 돌아온 이홍규 과장은 가슴속 양심의 소리가 격렬히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어린 학생의 죽음을 이렇게 덮어두어도 되는가? 그것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짓 아닌가?’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동안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봐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진실을 묻어둔 채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윗사람들의 결정에 그냥 따르기가 무척 괴로웠다. 오전 회의를 마친 뒤, 내내 서성이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1분, 1초가 흐를수록 진실의 무게가 태산처럼 자신의 존재를 압도해오고 있었다. 오전 9시 50분, 중앙일보 사회부의 신성호 기자가 찾아왔다. 이 과장은 차나 한 잔 하라며 자리에 앉혔다. 법조계 출입 6년차인 신 기자는 서소문동 검찰청사를 매일같이 드나들어 이 과장과는 오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었다. “경찰들 큰일났어.”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 과장이 불쑥 내뱉었다. 뭔가 긴급한 일이 터졌다는 느낌이 꽂혔다. 자칫 서두르다가는 줄기를 놓칠 수 있었다. 그는 상황을 알고 있다는 투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경찰들이 요즘 너무 기세등등했거든요.” 신성호 기자는 이날 그가 딥 스로트(deep throat), 즉 내부 비리를 고발하는 익명의 고발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과장은 어제 경찰 조사를 받던 학생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털어놓았다. “서울대생이라지, 아마? 그 대학생이?” 이어지는 그의 말이 천둥처럼 들렸다. 하지만 신 기자는 태연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어디서 죽었대요?” “남영동이라던가?” 말을 마치자, 이홍규 과장은 가슴속 바윗돌 하나를 덜어낸 것처럼 후련해졌다.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신 기자의 눈에 언뜻, 살아 꿈틀거리는 기사의 몸통이 보였다. 남영동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의미했다. 남영동은 이 사건의 뇌관이었다.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이 죽었다.’는 게 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여기에 뇌관을 집어넣으면 어마어마한 메가톤급 문장이 되었다. 그 후폭풍의 범위는 아무도 측량할 수 없었다. ‘남영동에서 조사 받던 서울대생이 죽었다’는 것은 곧 ‘고문에 의한 사망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군사독재 시절의 은유가 직유로 바뀔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신성호 기자는 대검찰청을 나온 뒤, 데스크인 이두석 사회부장에게 곧장 전화했다. “이 부장,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이 갑자기 죽었답니다.” “뭐라고? 그거, 큰일이군. 이봐, 신 기자. 중앙수사부와 서울지검에 가서 고문 사실 여부와 사망자 인적 사항을 철저히 확인해봐.” 전화 통화를 끝낸 두 사람은 바삐 움직였다. 이 부장은 서울대 출입기자와 부산 주재기자에게 각각 학적부 조회, 가족관계 확인을 지시했다. 신 기자는 곧장 중앙수사부 1과장 이진강 부장검사에게 달려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이 부장검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사받던 대학생이 죽었다는데, 고문 아닐까요?” “가능한 일이지만 속단할 수는 없지.” “다른 데도 아니고 남영동이잖아요.” “경찰이 쇼크사로 보고했다잖소. 조사를 더 해보면 알겠지.”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이진강 부장검사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비치며 말꼬리가 처졌다. 중앙수사부 사무실을 나온 신 기자는 서울지검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울지검은 공안사건 보고를 받고 처리하는 곳이었다. 그는 최명부 1차장 검사를 만나 따지듯이 물었다. “젊은 청년이 쇼크사했다는 걸 믿을 수 있어요? 노인도 아닌데요. 고문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검찰이 직접 수사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최 차장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사실 확인을 해주는 대신 굳은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당신, 조금이라도 기사를 잘못 쓰면 곤란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걸.” 신 기자는 쐐기를 박는 듯한 최 차장의 말을 어깨로 받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오전 11시 30분, 그의 다음 행선지는 서울지검 공안부 김재기 검사실이었다. 신 기자는 취재수첩을 펴들고 사망한 학생의 인적 사항 확인에 들어갔다. “검사님, 경찰 조사를 받다 사망한 서울대생 이름이 뭔가요?” 김 검사는 신 기자가 이 사건에 대해 거의 다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박종, 뭐라고 했는데…….” “학과는요?” “언어학과 3학년.” 그는 숨 가쁜 오전 취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의 손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진실의 조각들이 쥐어져 있었다. 서둘러 발품을 판 보람이 있었다. 데스크에도 각 주재기자와 출입기자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학생의 이름은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종철이었다. 부산 가족들과도 통화가 이루어져 가족관계 확인도 마쳤다. 가족들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떠난 뒤라서 부재중이었다. 이제, 신성호 기자의 머릿속에는 조각조각 나뉜 진실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다. 그는 기사를 작성한 뒤 데스크에 전화했다. “신 기자, 시간 없으니 기사 쓴 것 지금 불러줘.” 그가 기사를 불러주자 데스크가 받아 적기 시작했다.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군(21.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 이날 하오(오후)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데스크에서 기사를 모두 확보한 시간은 오후 12시, 점심시간이었다. 편집국에 비상이 걸렸다. 석간 초판 인쇄는 이미 끝난 뒤였고, 이제 막 돌판(1.5판) 인쇄가 돌아가고 있었다. 인쇄소 안에는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바퀴 소리 같은 규칙적인 기계음이 가득 했다. “윤전기 세워!” 금창태 편집국장대리가 인쇄소에 직접 가서 지시했다. 윤전기가 일시에 멈췄다. 그는 신성호 기자가 쓴 속보성 기사를 사회면에 2단 기사로 집어넣었다. 윤전기를 돌리라는 그의 지시에 따라 윤전반의 기사들이 신속히 움직였다. 가동을 다시 시작한 윤전기에서 거친 쇳소리가 들렸다. 1987년 1월 15일 오후 3시 30분, 가판대에 쏟아져 나온 《중앙일보》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특종이었다. 사람들은 커다란 활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원문] 주먹만 한 제목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이 기사는 바야흐로 온 세상을 폭풍 속으로 휘몰아갔다. 국내 신문들이 다투어 후속 보도를 내보내는 사이, 《AP》《AFP》 등 서울발 외신의 긴급 타전이 이어져 박종철 군 사망 소식은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신문이 가판대에 깔린 뒤, 편집국에는 전화가 빗발쳤다. “기사 당장 안 빼?” 맨 먼저 문공부 홍보조정실 담당자가 금창태 《중앙일보》 편집국장대리에게 전화해 대뜸 욕설을 퍼부으며 항의했다. 문공부는 ‘보도지침’을 충실히 이행하는 정권의 나팔수였다. 강민창 치안본부장도 뒤이어 전화를 걸어 핏대를 세웠다. “그 기사 오보야, 오보!” 하지만 진실을 언제까지나 은폐할 수는 없었다. 다급해진 경찰은 긴급 대책회의를 연 뒤, 오후 6시에 대국민 기자회견을 가졌다. |
하지만 이후 중앙일보는 후속 보도에 소극적이었다. 1월 15일 MBC는 단신을 통해 이 사건을 내보냈는데 당시 담당앵커였던 신경민은 통상 15~20초면 읽는 단신문장을 30초 이상 길게 끌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MBC 보도국에서는 "신경민이는 끝도 없이 단신을 하냐"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동아일보가 1월 16일부터 부검의 오연상과 박종철의 삼촌인 박월길 등의 증언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단순 사망이 아님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도지침을 어기고 1월 19일에는 "물고문으로 질식사"를 1면 탑기사로 실어 대서특필하고 고문 근절 특집 기사를 사회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공론화되었다. 동아일보의 이 보도는 6월 항쟁을 촉발한 결정적인 보도였다.
2020년에는 사건이 중앙일보에 의해 최초로 보도된 직후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경찰들과 싸우면서 취재하는 KBS 기자의 영상이 40년만에 공개되었다. 당시에는 정권이 정권인지라 언론들에 대한 탄압이 심했고 특히 KBS는 국가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는 방송사임에도 과감하게 취재했다.
수뇌부의 사건 은폐 기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박처원 치안본부 5차장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
정호용 내무부장관
보도 다음 날인 1월 16일경에 치안본부 특수수사대가 해당 사건의 수사에 착수했고 경찰 총수인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은 위에서 서술한 대로 직접 기자회견에 나와서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 시인을 했으나 이내 언론의 추적이 시작되었다. 5공의 주무기인 보도지침도 이때만큼은 통하지 않자 사건의 진상이 양파껍질 벗겨지듯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했다.
민심이 폭발하자 정권은 겨우 4일 만인 19일 2차 수사 결과에서 강민창의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견해를 뒤집고 고문이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발표 결과 박종철은 조한경 등 두 경찰에 의해 목 뒷덜미와 양손이 잡힌 채 두 번이나 욕조에 머리를 처박히다 목 부분이 욕조에 눌려 경부압박으로 질식사했으며 부검 결과 사망 시각이 14일 오전 11시 20분경이고 복부팽만은 수사관들의 인공호흡 및 초진 의사의 호흡기 주입으로 공기가 위장에 들어가 생긴 일시적 현상이며 폐 조직검사 결과 수분이 검출되지 않았고 폐 기공 현상은 박종철이 과거에 앓았던 폐결핵으로 인한 폐 손상 흔적이고 왼손과 머리 부위에 입은 타박상은 저항으로 생긴 부상이며 부검 내용 중 경부압박 외의 사항은 박종철의 사인과 직접적 관계가 없다고 나왔다.
경찰은 발표 직후 조한경과 강진규 등 고문 경찰 2명을 구속하여 서울서대문경찰서로 이송했는데 구속 당시 경찰은 수감되는 동료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똑같은 흰색 점퍼를 뒤집어 쓴 경찰관 10여 명과 같이 승합차에 태웠다. 결국 이들이 차 안에 웅크리는 모습은 신문과 방송에 실려 경찰의 제 식구 감싸기를 고발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위와 같은 모습을 찍어 놓고도 신문에 싣지 않았는데 1989년 6월 8일자 <조선노보> 호외에 의하면 이러한 일이 일어난 당일 해당 사진에 대해 "당신들은 동료가 구속되면 감싸주는 인정도 이해하지 못하냐?"는 간부들의 질책으로 인해 신문에 싣지 못했다고 한다.
20일 해당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지검 측은 경찰 수사결과와 검찰이 그동안 벌인 관련 참고인 10여 명에 대한 방증조사 내용 및 사체 부검결과와의 상충점, 직접적 사망 원인인 물고문 외에 다른 고문이 있었는지의 여부와 연행 시간을 밝히는 데 수사의 초점을 두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은 비공개 현장검증 다음날인 24일에 수사결과 발표와 더불어 고문 경관들을 구속/기소한 사실을 밝히며 박종철 시신의 외상 소견과 부검 감정서 등으로 보아 전기고문은 없었으며 당시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은 2명 뿐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발표 내용에 따르면 박종철의 몸에 전기 고문 흔적은 없고 15군데의 상처는 박종철이 수사 도중 저항하다 생긴 것이었으며 왼쪽 사타구니에 난 3개의 상처는 박종철이 자술서를 빨리 쓰지 않아 조한경 경위가 볼펜으로 3번 찔러서 난 상처고 오른쪽 검지 끝에 난 멍자국 역시 반항하다 생긴 흔적이며 연행 시간은 경찰이 2번 발표한 대로 14일 아침 8시 10분경이 아닌 새벽 6시 40분경이고 폐 속에서 나온 혈반은 박종철의 지병인 폐결핵으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정 검사장은 확신에 찬 듯 "검찰은 할 만큼 조사를 다했다. 공소 유지에 필요한 직접적 범죄사실 외에도 여론으로부터 제기된 의문점에 대해서까지 조사를 했다"고 밝혀 검찰의 축소은폐 의혹까지 불러일으켰다.
그 증거로 검찰은 박종철의 연행 시간이 경찰 발표보다 1시간 30분 빠른 오전 6시 40분이라고 하였으나 박종철에 대한 조사 시간은 경찰과 동일한 오전 10시 50분 ~ 11시 30분까지 30분 간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2차례나 자술서를 쓰고도 추궁당한 뒤 물고문을 2차례 걸쳐서 받는 데 30분이나 걸렸다는 점은 납득할 수 없었으며 박종철의 시신은 살해된 현장에 보존한 뒤 검사의 지휘를 받아 처리하여야 함에도 검사 지휘 없이 이송되어 부검 뒤 서둘러 화장하여 증거를 인멸하였다. 박종철의 어머니 정차순은 화장에 반대하다가 기절했지만 당국은 정차순을 어느 병원에 떨어뜨려 놓고 화장을 강행했다. 또 박종철 사망 소식을 심장마비 쇼크사로 1단 기사로 내도록 보도지침을 내린 사실이지만 부검의인 황적준이 부검 전후 대공 5차장과 밀담한 것, 부검기록 및 부검사진 비공개 등은 '정부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국민들의 의심을 샀다.이후 재판 상황
2월 7일에 김종호 내무부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물러났다. 이 와중에도 일선 경찰들의 의욕이 너무 앞서서 벌어진 과잉행동으로 물타기하면서 고문에 가담한 경찰과 지휘계통을 축소, 은폐하였다. 그리고 후임 내무부장관으로 군 출신 강경파로 정권 핵심인 정호용을 임명해서 이 사건으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사건 축소 폭로
하지만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민주화운동가이자 동아일보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훗날 열린우리당 의장)이 사건이 축소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휴지에 적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 외부에 알려졌는데 정말 우연히도 이부영이 수감된 교도소 옆방에 2명의 고문경찰관인 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가 들어왔다. 이부영의 증언에 따르면 옆방에서 계속 우는 소리가 들려서 친분이 있는 교도관을 통해서 알아보니 '사실은 고문경찰관이 더 있는데 우리만 잡혀왔다. 우리들만 모두 뒤집어쓰게 됐다.'는 진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군부독재정권 시절에는 교도소에 들어온 반독재 민주화운동가들에게 우호적인 교도관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교도관과 경비교도대원들의 폭압적 통제가 기승을 부렸던 1986년부터 1987년까지의 상황에는 더더욱 그랬다. 대놓고 표현은 못 해도 이런 교도관들이 은근히 여러 가지 편의를 봐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교도관 중에 한 명이 "사건이 축소은폐됐다"는 것을 이부영에게 알려주었고 이부영이 은밀하게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문서는 또 다른 교도관 1명을 통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마티아 신부에게 전달되었다.
이 교도관들의 신원은 혹시 모를 불이익 때문에 비밀에 부쳐지다가 모두 정년퇴직한 2010년에 같은 영등포 교도소에서 근무했던 직원이 <가시 울타리의 증언>(황용희, 멘토프레스)이라는 책을 쓰면서 강제로 아웃팅시켰다. 이부영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 사람들을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라고 표현했다. 처음 이부영에게 사건의 전말을 귀띔한 사람은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이었던 안유였으며 이부영의 부탁으로 펜과 종이를 전달한 후 작성된 쪽지를 외부로 운반한 사람은 교도관 한재동이었다. 이 2명은 2012년 박종철 25주기 추모식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재동은 퇴직 교도관 전병용을 통해 김정남에게 문건을 전달했고 김정남은 다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에게 알렸다.
즉, 안유 계장 -> 해직기자 이부영 -> 한재동 교도관 -> 전병용 퇴직 교도관 -> 재야 운동가 김정남 -> 함세웅 신부 순으로 문건이 만들어져 이동하고 세상에 알려진 것.
또 당시 검안의였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오연상은 박종철이 물고문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알았고 거기에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닌 병원에서 숨졌다고 조작하여 은폐하려는 경찰의 음모를 알아채고 중앙대학교병원 측에 시체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요청하였다. 당연히 같은 죽음이라도 고문실에서 사망과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 중 사망은 뉘앙스 자체가 다르다. 결과적으로 박종철의 시신은 경찰병원에서 사망 판정을 받았다.
경찰은 이후 오연상에게 수사관 3명을 붙여 감시하였고 그 다음 날(15일)에도 감시했으나 오연상은 화장실에서 잠입하고 있었던 동아일보 기자 윤상삼을 불현듯 만나서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음을 알렸다. 소리소문없이 은폐될 수도 있었던 박종철 사건은 한 의사의 양심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이후 고려대 법의학과 교수로 박종철 시신을 부검한 부검의 황적준도 "사인을 심장쇼크사로 하라"는 외압에 시달렸지만 불의에 타협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는 부검결과를 발표함으로써 오연상의 검안을 확증하였다.
하지만 오연상은 이후 신길동 특수수사 2대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그 옆에서는 비명소리가 연거푸 들려 왔는데 박종철을 고문하던 수사관들을 조사하는 소리였다고 한다. 오연상은 "참 이상한 세상이다. 박종철 군을 고문해서 죽이고 이번엔 그 수사관들이 고문을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하였다.
경찰 및 안기부 상층부는 이들이 고문치사에 책임을 지고 구속되는 것에 불만을 품자 상관인 박처원 치안감을 통해 5,000만 원이 들어 있는 예금통장 4개, 즉 2억을 준비해 2개씩 주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2개씩 1억 원을 주고, 곧 가석방으로 꺼내주겠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이 돈의 출처를 묻자 "경찰 동료들이 조금씩 모았다"고 했는데 누가 봐도 안기부 자금이었다. 믿을 사람은 없었지만 밝힐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다.
더불어 정권 내 알력이 이것의 은폐를 막았다는 견해도 있다. 10월 유신 이후 최종길 교수나 장준하의 의문사가 있었고 더욱이 1985년부터 1986년에도 기혁, 우종원, 신호수, 김성수 등이 당한 의문사들이 묻혀져 경찰은 고문을 마음대로 자행하던 판국이었다. 그런데 당시 2인자이기는 했으나 전두환의 심복인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후계자 경쟁을 해야 했던 노태우 세력은 내각제를 추진해 주도권을 쥐려고 했고 장세동 측은 이에 고문 사실을 흘려 이를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려고 했지만 이 사건의 파문이 크게 번지면서 오히려 장세동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대국민적 저항을 촉진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제1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의 아우, 너의 아들, 너의 제자, 너의 젊은이, 너의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하고 책상을 치자 '억'하고 쓰려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박종철 열사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군 추모 및 고문추방을 위한 인권회복 미사의 김수환 추기경 강론문
앞서 발표된 2명 이외에도 3명의 고문 경찰이 더 있었다는 사실은 이부영의 비밀서신을 통해 세상에 은밀히 전해졌고 이를 공개한 사람들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1987년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김승훈 마티아 신부의 폭로로 진상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처음 5공 정권은 보도지침과 언론통제를 통해 이를 은폐하려고 했고 일부 언론에서 단편적인 보도만 작게 나왔다. 서울대교구 주보에도 나왔다.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못하면 거의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5월 22일 동아일보에서 경찰의 사건 은폐와 가담자 축소 사실의 구체적인 내용을 처음으로 대서특필하고 이후에도 관련 후속 보도를 이어나갔다. 이 보도들로 동아일보 취재팀은 1987년에 한국기자상을 받았고 1988년에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이날 동아일보를 찾아보면 김승훈 마티아 신부의 폭로로 드러난 고문가담 경찰 은폐 관련 보도로 신문의 3분의 1 이상이 채워져 있다. 그만큼 충격적인 뉴스였다는 이야기.
5월 21일,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추가적으로 3명의 범인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당시 정 검사장의 회고에 따르면 수사 중 3명의 공동정범이 있음을 인지했고 이를 서동권 검찰총장에게 보고하자 서 총장은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당분간은 우리만 알고 있자고 했다고 한다. 덮을 생각이 없었고 3명의 사법처리를 타진하고 있을 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했다는 것이다. 사실인지의 판단은 알아서 하자.
결국 5월 22일 경찰은 공동정범 3인을 스스로 연행해 서울지검으로 데려왔고 공동정범 3명(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사, 이정호 경장)이 구속되었으며 이후 이를 은폐하도록 지시한 박처원 치안감(당시 치안본부 5차장), 유정방 경정(당시 대공 수사2단 5과장), 박원택 경정(당시 대공 5과 2계장) 등이 추가 구속되었다. 이에 검찰은 사건 당일인 1월 14일 오후 5시경 치안본부 대공사무실에서 조한경 등 고문경관 5명이 모여 박종철 사망 사건에 대한 <동행피해자 변사사건 발생 보고서>를 쓰면서 조한경과 강진규 2명이 범행한 것으로 축소하기로 하고 유 경정의 지시에 따라 박 경정이 은폐 조작을 지휘한 뒤 고문경관 5명에게 예행연습을 시켰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강 전 치안본부장에 대해선 사전 조작에 직접 관계가 없다고 하여 돌려보냈다.
수사 주체를 지검에서 대검으로 격상시키기까지 해서 집중수사를 편 검찰은 "검찰의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의 의문은 없다"고 밝혀 의문만을 남겼다. 이 중 가장 큰 의문은 박 치안감이 조작 각본의 총 연출자인가 하는 점과 일개 치안감이 엄청난 사건을 수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혹이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박종철 사망 1주기인 1988년 1월 14일에 당시 담당 부검의와 수사 담당검사의 증언으로 점차 드러났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이 "부검 과정에서 경부압박 질식사로 판명되어 보고했으나, 강 치안본부장으로부터 '부검소견서를 변경하고 외상 부분을 빼라'는 외압이 있었다"고 증언했고 당시 수사 검사였던 안상수 역시 "박종철 사건을 검찰에서 직접 수사하려 했으나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초동수사를 경찰에 맡기기로 하면서 사건 조작의 여지를 주었다"는 충격적 발언을 하면서 또 반전되었다. 이 둘의 증언으로 검찰이 다시 수사에 나서면서 1월 14일에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을 자진 출석케 한 뒤 다음날에 구속시켰다. 이 과정에서 강민창이 국과수 소장에게 100만원을 주며 회유하려고 한 사실이 드러났고 황적준은 조직에 해를 끼쳤다며 국과수를 떠났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못한 점이 더 있다. 특히 가장 의문이 된 것은 사건 전개과정에서 치안본부장이 최고 사령부로써 독자적 권한을 발동해 사태를 수습/무마했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안상수가 증언한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더 의혹이 증폭되었으며 초동 수사과정에서 검찰의 명예를 걸고 즉시 수사해 진상을 규명하겠다던 검찰이 태도를 바꿔 경찰에 수사하도록 한 점, 송치 4일 만에 조한경 등 2명에 기소명령이 떨어진 것과 조한경 본인이 심경 변화로 옥중 폭로를 했는데도 3개월 간 수사를 미룬 점도 한 몫 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법무부 고위 관계자가 조한경 등이 수감된 영등포교도소(현 서울남부교도소)를 방문하고 3월 초에 이들이 의정부교도소로 이감된 경위 역시 의혹이 더 불거지게 했다. 또 박종철의 폐에 나타난 출혈반으로 보아 전기고문이 있었는가 등의 의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여파와 개각 단행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무고한 대학생을 고문해 죽이고도 모자라 진실을 은폐하고 사건을 조작하려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운동권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시민들조차 분노에 들끓었고,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전두환 정권은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정호용 내무부장관, 김성기 법무부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이영창 치안본부장 등 관계기관의 수장들을 전원 '문책 인사' 형태로 경질하는 개각까지 단행하기에 이르렀지만(정부의 2인자이던 노신영 국무총리, 정권의 2인자이던 장세동 안기부장. 검경의 1, 2위인자인 법무장관, 검찰총장, 내무장관, 치안본부장을 한꺼번에 교체한 것이다.)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이후 연세대학교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 피격 후유증으로 중태에 빠졌고(이후 사망하였다.) 6월 항쟁이 발발하면서 제5공화국은 그 명을 끝마치게 되었다.
사건 이후의 가해자 및 관련자들
피고인들이 경찰에 봉직하면서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대공분야에 헌신했고 유죄판결 자체만으로도 그동안 쌓아올린 공로에 치명상을 입게 된 점을 참작,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 집행유예로 석방하면서 내린 판결문.
당시 경질된 고위 인사들은 공직 은퇴 후에도 호의호식하면서 천수를 누렸다. 1993년 1월 15일 동아일보 기사
- 김성기 법무부 장관은 대한법률구조공단, 주택은행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 김종호 내무부 장관은 13, 14, 15, 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18대 총선 낙선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 서동권 검찰총장은 1989년부터 안기부장으로 3년 6개월간 재직했고 이후에도 대통령비서실에서 근무하면서 노태우 정부의 실세로 호의호식했다. 전직 안기부장들이 흔히 당하곤 하던 구속은커녕 기소조차 당하지 않고 편안한 노후를 보냈다.
- 정구영 검사장은 노태우 정권에서 검찰총장이 되었고 진로문화재단 이사장도 역임했다.
- 김종호의 뒤를 이어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가 5개월 만에 경질된 정호용은 1987년 7월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1개월 만에(...) 내각에 복귀했고 대구광역시 서구 갑에서 13,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 이영창 치안본부장은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이사장과 14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 박처원 치안감은 구속 4개월 후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석방되었다. 강민창과 함께 항소해서 1990년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가(87노3543) 1991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후(90도2801) 1993년 서울고법 파기환송심과 1996년 대법원 상고심에서 1심 판결을 재차 선고했다. 1988년 퇴임 후 전직 대공경찰관 10여 명과 함께 '현대비교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1993년까지 운영하면서 대공수사 기법 등을 연구하는 한편 고문 경찰관들의 대부 역할을 하면서 이근안의 도피를 지원했고 카지노에서 10억 원을 빼돌려 이근안 등 고문 경찰관들에게 지원했다. 1999년 범인도피 혐의로 다시 법정에 섰으나 고령과 당뇨병 등을 내세워 집행유예로 석방되었고 2008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고 이후 은둔하면서 조용히 지냈다. 2006년 전직 경찰 간부 25명과 함께 전시작통권 반대 성명서에 서명했고 2018년 7월 8일 향년 85세로 사망했다.
- 담당 검사 박상옥은 2015년 대법관이 되었다.
- 사건 초기 경위서 작성을 담당하면서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전설적 문장을 탄생시킨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1계장 홍승상 경감은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불기소되었고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여 1990년 1월 경정 승진, 1991년 7월 보국훈장 삼일장, 1994년 12월 홍조근정훈장을 수상했고 1997년 1월 총경으로 승진해 화순경찰서장으로 부임했다가 40여 일 만에 이한영 암살 사건이 발생해 분당경찰서장으로 부임했다. 1998년 퇴임 후에는 <현장에서 본 좌익의 실체>라는 저서를 펴내고 대한민국재향경우회 기획조정위원을 역임했으며 각지에서 안보 강연까지 했다.
살인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경찰관 5명은 징역 3~10년을 선고받았으나 3년부터 7년 3개월까지 살다가 출소했다. 그리고 1998년 6월 8일 CBS 보도로 조한경, 강진규, 이정호가 경찰 유관단체에 취직[40]한 게 밝혀졌다. 인사 규정상 형 집행 후 2년이 지나지 않으면 채용이 안 된다는 규정까지 어기면서 채용되었고 이 사실이 보도되자 경찰은 이들을 해직시킬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1999년 12월에 나온 <신동아> 2000년 1월호에 고문 경찰 중 1명이었던 조한경의 근황이 전해졌는데 조한경은 사건 이후 구속되어 감옥에서 자신이 사건의 주범이 된 데 분노하여 자살 시도를 두 번 하려다가 실패했고 호적에서 제적하라고 요구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부인이 생계를 위해 봉제공장을 다녔으나 생활비 부족으로 시가 1600만원 짜리 자택을 팔았고 총포화약안전기술협회에서 해직된 후 친척 형이 소유하던 건물의 관리인으로 80만원을 받고 일했으나 1999년 법무부가 박종철 사건 고문경관들에 대해 구상권 청구소송을 내자 4000여만원 짜리 지하 전셋방까지 압류당했다. 이름마저도 임의로 '조한평'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단순한 고문치사 사건이 아닌 대통령 측이 정치 일정 등을 고려한 분부에 따라 무리하게 발생된 '정치적 사건'이라고 주장하던 한편 박처원이 경찰 간부로부터 10억을 받았다는 점에선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감옥 생활 당시 그는 박종철의 부친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두 차례 보냈으나 전부 되돌려졌다.
형사 재판
이 판결의 판시사항 및 판결요지는 다음과 같다.
대법원 1988. 2. 23. 선고 87도2358 판결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집36(1)형,374;공1988.4.15.(822),623]
【판시사항】
가. 피해자의 머리를 잡아 욕조의 물속으로 누르게 될 경우 질식현상 등에 대한 예견가능성의 유무
나. 상관의 위법 내지 불법한 명령과 하관의 복종의무
다. 상관명령에의 절대 복종이 불문률로 되어 있는 경우 위법명령에 따른 행위가 정당행위 내지 강요된 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
【판결요지】
가. 양손을 뒤로 결박당하고 양발목마저 결박당한 피해자의 양쪽 팔, 다리, 머리 등을 밀어누름으로써 피해자의 얼굴을 욕조의 물속으로 강제로 찍어누르는 가혹행위를 반복할 때에 욕조의 구조나 신체구조상 피해자의 목 부분이 욕조의 턱에 눌릴 수 있고 더구나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반사적으로 반항하는 피해자의 행동을 제압하기 위하여 강하게 피해자의 머리를 잡아 물속으로 누르게 될 경우에는 위 욕조의 턱에 피해자의 목부분이 눌려 질식현상 등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칙상 어렵지 않게 예견할 수 있다.
나. 공무원이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상관은 하관에 대하여 범죄행위 등 위법한 행위를 하도록 명령할 직권이 없는 것이고, 하관은 소속상관의 적법한 명령에 복종할 의무는 있으나 그 명령이 참고인으로 소환된 사람에게 가혹행위를 가하라는 등과 같이 명백한 위법 내지 불법한 명령인 때에는 이는 벌써 직무상의 지시명령이라 할 수 없으므로 이에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다. 설령 대공수사단 직원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이 불문률로 되어 있다 할지라도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고문행위 등이 금지되어 있는 우리의 국법질서에 비추어 볼 때 그와 같은 불문률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고문치사와 같이 중대하고도 명백한 위법명령에 따른 행위가 정당한 행위에 해당하거나 강요된 행위로서 적법행위에 대한 기대가능성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게 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 판례는 형사법상 책임조각사유로서 강요된 행위(형법 제12조) 및 적법행위에 대한 기대가능성이 없음을 부정한 사례로서 의미를 가진다. 즉 공무원 중 하급자는 상급자의 적법한 명령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고문치사와 같이 명백히 위법 내지 불법한 명령인 경우 따라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 판례의 주문과 이유 부분에 대해서는 판결문 전문을 참고 바람.
기념 및 추모 조형물
박종철의 묘소는 따로 없었는데 1987년 1월 16일 아침에 벽제화장장(현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 후 임진강에 산골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9년 초혼장을 치룬 후 산골한 곳의 흙을 관에 담아서 가묘를 만들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이 가묘가 있다. 대신 그를 추모하는 조형물이 몇개 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박종철 열사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일부 단과대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으로 학교 탐방을 할 때 꼭 지나가는 코스이다.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에도 2002년에 펜촉 모양의 기념비가 신관과 본관 사이에 세워졌다. 박종철 문서의 관련 기사를 참조해 보면 알겠지만 이 기념비가 세워지는 데도 동기회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사건 초창기에는 박종철 이름만 꺼내도 교사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고. 겨우 이름을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2002년경이라 그때야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인데 초기안은 흉상이었으나 학교의 반대로 인해 기념비 정도로 타협한 거라고 한다.
2018년 1월 13일에는 31주기를 하루 앞두고 그가 지냈던 하숙집 골목 앞 길이 '박종철 거리'로 제정되었다. 녹두거리 대학5길에 박종철 거리임을 알리는 동판이 있으며 인근 도덕소공원 담장에 그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다.
2020년 6월 민주항쟁 33주년을 맞아 서울특별시 관악구 박종철 거리에 생전 박종철의 모습을 본뜬 동상과 벤치가 마련됐다. 벤치에는 1986년 7월, 박종철이 구속 상태에서 썼던 편지의 한 구절이 오롯이 새겨졌다. 이 벤치는 서울대 동문들의 모금과 관악구의 지원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제작했다. 박종철 거리 일대에는 박종철을 기리는 기념관과 기념 공원도 조성될 예정으로 전해졌다.
2021년 6월 사건 당시 강압적 조사와 인권탄압을 자행한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화운동을 기리는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재정비해 2023년 6월 다시 문을 열 예정으로 전해졌다.
박종철의 죽음 이후
관계기관대책회의나 그 구성원들이 사건에 위법하게 개입한 점이 확인되는 바, 국가는 정권의 필요에 따라 국가형벌권 행사의 법적 장치를 넘어 정치적으로 검찰의 수사권을 침해한 점과 검찰이 외압에 굴복하여 헌법과 법률로 부여된 수사권을 적절하게 행사하지 못한 점에 대하여 유족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 검찰 또한 헌법에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었음에도 권력층의 압력에 굴복하여 진실왜곡을 바로잡지 못한 점에 대하여 사과할 필요가 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관계기관 대책회의 은폐,조작 의혹사건
민주화 이후 1989년에 박종철 군의 유가족들은 국가와 고문치사 사건 관련 경찰관들을 상대로 1억 2천만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그 결과 1995년 11월에 대법원은 "국가와 고문경찰관 5명은 연대해서 1억 4천 7백만 원을, 그리고 경찰수뇌 4명은 직무유기 및 범인 도피의 책임을 지고 2,4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박 군의 유가족들은 이자를 포함해 총 2억 4천만 원의 손해배상금을 수령했다.
안상수는 이 사건의 담당 검사였고 문민정부 하에서 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으로 자신이 주동적으로 사건 은폐를 막았다고 주장했지만 조국은 "안상수가 아닌 그의 상관인 최환 부장검사가 박종철 시신의 부검을 지시하여 이 사건의 은폐를 막았다"고 반박했다.
이 사건을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이 일으켰다고 아는 사람도 가끔 있는데 이 사건만은 정말 이근안과 무관하다. 당시 이근안은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장으로 경기도경찰국 소속이었고 이 사건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어났다.
1999년, 이 사건은 전현직 언론인 12명으로 심사위원을 구성해 20세기 한국을 뒤흔든 특종 중 하나로 선정됐다.
2001년, 박종철이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지정됐다.
2009년, 정부 차원의 조직적 은폐 시도가 있었음이 공식 확인됐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87년 사건 발생 당시 정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 조작하기 위해 안기부장·내무부 장관·법무부 장관·검찰총장·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구성된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최소 2회 이상 열었던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2012년, 한겨레에서 25주년을 기념하여 그때 그 사람들의 행적을 정리한 기사가 나온 바 있다. 위에 정리된 내용과 거의 유사하지만 원한다면 참고. 더불어 이 사건을 밝히는 데 일조한 검사 최환과 부검의 황적준이 30년 만에 만났다.
2016년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가 열리고 박근혜가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라는 식으로 책상을 쿵쿵 내려치는 반응을 보이자 이 사건이 재조명되었다.
2018년 1월 9일, 조현배 부산경찰청장이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가 입원한 부산의 한 요양병원을 찾아 경찰의 고문 행위에 대해 사죄했다.
2018년 3월 20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요양원에 있던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를 만나 31년 만에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에 대해 직접 사과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2018년 3월 26일,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이 사건이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에 실리는 것이 결정됐다. "1987년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불법적으로 경찰에 끌려갔던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내용이다.
2018년 3월 30일,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이 사건이 국제사회에 부각이 안 되도록 외교 활동을 벌인 사실이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2018년 10월 검찰이 사건을 축소한 것에 대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2020년 6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 현장을 찾아 헌화했다. 현직 대통령이 권위주의 시대 인권 탄압의 상징인 이곳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2020년 10월,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등 민주화 유공자 12명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정부가 6월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민주화 유공자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향한 인물들
- 박종운 박종철이 고문당하고 죽은 이유가 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은 2000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지구당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16대~18대 총선에서 내리 연속으로 3연패를 하면서 정계를 떠났다. 이후 극우 언론사 미디어펜의 논설위원이 되었다. 비록 전향했지만 매년 박종철의 기일(1월 14일)과 생일(4월 1일)이 되면 그가 묻힌 마석 모란공원을 찾는다고 한다. 가는 이유는 2022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종철이 때문에 갑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날 종철이가 저에게 ‘춥지예?’ 하며 둘러준 목도리를 끝내 돌려주지 못한 게 미안하고 한스러워서."라고 밝혔다. 2022년 기준으로 택시기사로 활동하고 있다.
- 오현규 박종운에 가려져서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문서 최상단의 두 번째 사진에서 영정을 들고 있는 사람은 박종철의 후배로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이었던 오현규다. 그는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 해운대구의원에 당선되었다.
- 금창태 정권의 외압에도 불구하고 뚝심있게 최초 보도를 내보내서 사건을 세상에 알렸던 그는 1990년대부터 홍석현 전 중앙일보 대표 아래에서 전무, 사장, 부회장 등의 요직을 지내다가 2001년에 중앙일보를 퇴사하고 2003년에는 동료였던 심상기 서울문화사 회장의 부름을 받아 계열사인 시사저널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일선 기자들에게 "삼성그룹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지 말라"는 압력을 가하고 결국 기사를 일방적으로 삭제하는 폭거를 저질러서 시사저널 기자단 전원이 파업하는 사상 초유의 '시사저널 사태'를 촉발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시사in 문서 참고.
- 김두우 신성호와 함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탐사했던 중앙일보 법조계 출입기자다. 당시 김두우는 서울대 학적부를 뒤져 박종철의 정확한 이름, 소속 학과와 주소를 찾아냈다. 이 특종 보도로 1987년 당시 신성호, 허상천 기자와 함께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2004년 한나라당의 총선 공천을 받아 퇴사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다시 회사측에 반려를 요청해서 조용히 복직했으며 이후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까지 지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으로 발탁되었으며 홍보수석까지 맡아 'MB 정부의 오른팔', 'MB의 입'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후 부산저축은행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박근혜 퇴임 후에는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 블랙리스트,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비판론
이들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들이 과거 독재정권이나 독점재벌과 연관되었다고 본다. 제5공화국 당시 전두환의 정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이 한나라당(지금의 국민의힘)의 전신임을 고려했을 때 한나라당에 들어가 정치 활동을 하거나 했던 박종운과 오현규의 행태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독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서 싸운 금창태가 재벌의 눈치를 보며 재벌을 비판하는 기사를 막으려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본인들은 정치적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박종운과 오현규 같은 사람들의 행적은 유족 입장에서 심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박종운에 대해서는 1987년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가 2018년 1월 썰전에 출연하여 "나나 박종운에겐 정치적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즉 고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라도 그쪽을 선택하면 안 되었다"고 말하면서[50] 박종철의 유족들도 박종운의 선택에 매우 힘들어했다고 직접 밝혔다.
옹호론
썰전에서 박형준은 다음과 같이 반론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국민들의 투쟁에 의해서 완성된 사건이지 그것이 사회주의를 지향한 사건은 아니였다. 6월 항쟁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답게 하자'는 취지에 전 국민이 동참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달성한 뒤 민주화 운동 세력의 노선은 분화되었는데 모두 자신들의 생각과 신념에 따라 분화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김영삼, 김대중 모두 분열되었다. 특히 김영삼이 3당 합당을 수용해 보수 쪽과 손을 잡으면서 이쪽에 손을 잡은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대표적인 예로 민주화의 비밀병기였던 김정남은 문민정부의 교육문화수석으로, <민중과 지식인>을 지은 한완상도 통일부총리로 재직하기도 했고 운동권들의 사상적 스승이었던 리영희도 문민정부 초기에 김영삼을 지지하기도 했다. 또 김영삼이 민주자유당을 장악하고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민중당 출신 김문수, 이재오 등 개혁 성향 인사들을 영입했고 신한국당이 통합민주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이 출범하는 과정에서 보수정당 소속이 된 민주화 운동 세력도 있다. 즉 이러한 분화는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무엇이 바람직한가?'의 생각 차이일 뿐이지 민주당계 정당이나 진보정당에 계속 참여하고 있으면 변절/전향을 안 한 거고 보수정당 등 비 민주/진보 정당을 갔으면 변절/전향 했다는 식의 판단은 옳지 않다.
기타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 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
- 크라잉 넛의 노래인 지독한 노래에 나오는 가사 "탁 치니 억 죽고 물 먹이니 얼싸 죽고 사람이 마분지로 보이냐"는 이 사건을 비판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가 사용한 기사문이라고 하는데…
탁 치니 억 죽고 물 먹이니 얼싸 죽고 사람이 마분지로 보이냐? - 크라잉넛, ‹지독한 노래›의 가사 중에서.
- 미디어아트 작가 안수진은 자신의 작품 <스테레오 수조>로 이 사건을 풍자했는데 2004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발표된 작품이다. 수조에 있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Mr. Sandman>과 고문당하는 사람을 형상화한 스피커에서 나오는 "몰라, 몰라" 하는 목소리가 대비되는 것이 압권이다.
- 2018년 사우디아라비아 기자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배후로 지목된 사우디 당국이 '카슈끄지가 용의자들과 주먹다짐 끝에 우연히 죽었다'고 성명을 발표하자 대한민국에서는 유사한 사건이었던 박종철 사건이 다시금 회자되었다.
- MBC 예능 프로인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을 방문해 이 사건을 다루었다. 여기서 당시 박종철 사건을 최초로 목격한 오연상 의사가 전화상으로 사건을 증언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