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나키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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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나키 터널이라 함은, 엄밀히는 구 이누나키 터널(위 사진의 터널)과 신 이누나키 터널 양쪽을 지칭하는 말이다. 다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괴담으로 유명한 구 이누나키 터널 쪽을 칭하는 말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구 이누나키 터널(旧犬鳴トンネル) 또는 이누나키 수도(隧道)는 일본 후쿠오카현 미야와카시와 카스야군 히사야마마치 사이의 이누나키토게(犬鳴峠, 이누나키 고개)를 관통하는 터널로, 1949년 개통되었다가 1975년 '신 이누나키 터널(新犬鳴トンネル)'이 개통되면서 폐쇄되었다. 폐쇄 후에는 2차선로의 신 이누나키 터널이 사용되고 있다.

구 이누나키 터널로 진입하는 도로는 사고 예방을 위해 미야와키시 시유지(市有地)로 관리되며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나 후술할 이누나키 마을 괴담과 관련하여 일본 최대의 고스트 스팟 중 한 곳으로 지목되면서 담력 테스트 장소로 쓰이는 등 불법 침입이 잦다.

구 이누나키 터널의 경우 매우 굽은 왕복 2차로 도로를 통해 산골짜기를 타고 올라간 뒤에 산 하나를 뚫고 지나가는 터널로, 통과 이후도 굽이친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가는 형태이다.

계획 자체가 1884~1885년부터 있었는데 당시의 토목 기술과 막대한 비용으로는 장대 터널을 뚫을 수 없어서 공사가 일시 중지됐지만 1927년 여러 마을들이 당국에 진정(陳情)해 재공사가 착수되었고 1949년 개통했다. 터널의 총 길이는 약 150m다. 1975년 고갯길 전체를 대체하는 신 터널을 뚫으면서 자연스레 사용량이 크게 줄었다. 한국으로 치면 미시령터널이 뚫린 뒤 구 56번 지방도 미시령 고갯길과 비슷하다. 이누나키 터널이 위치한 곳이 너무 외진 곳이다 보니 살인 사건이 터지고 심령 스팟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주변 지도를 보면 변변한 마을도 잘 없는 굉장히 외진 곳이다.

구글 지도로 이누나키 터널이나 주변 위치를 찾아보면 이 일대의 모습을 이미지로 쉽게 볼 수 있다. 촬영된 시점은 2014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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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새로이 개통된 신 이누나키 터널은 잘 운영되고 있으며 이곳은 구 터널과는 달리 지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장대 터널이다. 길이 약 1,385m로 꽤 길다. 게다가 커브가 있어서 그런지 위의 사진처럼 제한 최고 속도가 겨우 40km/h이다. 참고로 얼핏 보면 사진 속 자동차에 불이 붙은 것처럼 보이고 이 사진 역시 터널에 들어가면 원한을 가진 영혼들에 의해 몸이 불탄다는 괴담으로 위 사진이 쓰였는데 사실은 시바견이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다.

구 이누나키 터널에 대한 괴담

일본에는 이 터널에 관련된 괴담이 존재한다. 특히 '유령이 나온다는 터널에 담력 시험차 갔다가 끔찍한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 중 상당수가 이 터널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괴담이며 일본에서는 인터넷 초창기에 이누나키 마을이라는 이름의 도시전설도 유행한 바 있다. '산 속에 일본 국내법이 통하지 않는, 폐쇄된 공동체가 존재하고 외부인이 들어가면 돌아올 수 없다'는 내용. 물론 이누나키 마을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사카의 이코마 터널, 교토의 기요타키 터널과 더불어 일본 3대 심령 스팟 터널로도 불린다. 다만 터널뿐 아니라 예전에 이어진 도로마저 통째로 폐지되어 버린 구 이누나키 터널과는 달리 구 이코마 터널은 일부 구간이 현재도 전철 선로로 사용되고 있다. 1965년 신 이코마 터널을 개통하면서 폐쇄되었으나 1986년 킨테츠 케이한나선을 개통할 때 구 이코마 터널의 일부 구간(약 400m)을 그대로 사용하여 뚫었기 때문. 사용되지 않는 구간은 비상 대피로 역할을 한다.

또한 기요타키 터널은 시내버스도 통과하는 데다 신호등까지 설치해서 잘 운영되는 곳이다. 본래 1927년 협궤철도 터널로 건설되었는데 1972년 폐선 이후 도로터널로 개조한 것. 통과높이는 약 3.4m, 길이 약 500m. 물론 기요타키 터널 입출구 직전에는 우회로 역할을 하는 길인 137번 지방도가 이전부터 만들어져 있어서 이곳을 통해 갈 수 있다.

구 이누나키 터널로 가는 길은 펜스로 막혀 있으며 터널의 입구는 콘크리트 블록으로 봉쇄되었다. 무단으로 들어갈 경우 법률, 조례 등의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 된다. 현재는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는 터널 입구로는 갈 수 없고 이 반대편 입구로는 등산로를 통해 갈 수 있다. 그러나 반대편은 콘크리트 블록으로 완전히 막혀 들어갈 수 없으니 들어가기 위해선 적외선 카메라로 감시 중인 펜스를 넘어 위 사진의 입구로 향할 수밖에 없다.

구 이누나키 터널이 폐쇄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들어가는 도로의 폭이 좁고 급커브가 심해 통행이 불편하며 근처 일부 지역에서 절벽 붕괴 등의 위험성이 발견.

- 터널 부근에 쓰레기의 불법 투입이 잦음.

- 폭주족들의 집합 장소가 됨.

- 잦은 교통 사고와 1988년 이누나키 터널 살인 사건, 2000년엔 근처에 있는 댐에서 시체 유기 사건이 발생했다.

대한민국에는 이누나키 터널의 귀신이 한국계라는 소문과 그 이유에 관한 괴담이 많이 퍼졌다. 내용은 이러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 강제 징발된 조선인들이 터널을 뚫었고, 이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그렇게 갖은 고생 끝에 터널이 완성되자 살아남은 조선인들을 모두 터널 속에 집어넣어 몰살시켰다. '사람의 피가 섞여야 공사가 잘 된다'라는 미신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들을 학살했다.(이코마 터널에 관한 소문) 때문에 당시 죽은 조선인들이 원혼이 되어 터널 안을 떠돌고 있다.

이는 진짜로 조선인들을 동원해 지은 이코마 터널에 대한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1992년에 스미이 작가의 '다리가 없는 강'이라는 소설에 이코마 터널에서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들의 한 때문에 잇따른 사건이 발생했다는 내용이 담겨 일본 열도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내용을 다룬 바 있고 일본 영화 박치기에도 "이코마 터널을 누가 뚫은 줄 알아?"라는 대사가 나왔다. 마치 유령의 저주와 잦은 출몰로 차량 사고와 터널 폐쇄가 이루어진 것 같이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1900년대 당시의 공사 기술 부족과 차량의 운행 및 관리 수준이 떨어져 어디서나 비슷하게 많은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실제로 이코마 터널의 주요 사고는 1940년대 후반에 있었다. 다만 조선인 매몰사고는 1913년에 일어났는데 152명이 매몰되었지만 회사 측은 이들을 구조하지 않고 그냥 묻어 버렸다. 아울러 1964년에 근처에 신 이코마 터널이 새로 뚫리면서 낡고 오래된 구 터널은 자연스레 폐쇄되었다. 이후 1978년 킨키 일본 철도와 이코마 터널 인근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아서 터널 인근 절에 공사 중 희생된 조선계 노동자들을 추념하기 위한 "한국인 무연고자 위령비"를 세웠다.

또한 이코마 터널 인근의 키요타키 터널도 한국계와 중국계 노동자들이 지은 것이다. 실제로 1928년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당시 키요타키 터널을 뚫는 공사현장에서 조선인 50명이 가혹한 노동환경 때문에 폭동을 일으켰다는 보도가 있다.

구 이누나키 터널의 영향인지 신 이누나키 터널도 귀신 목격담이 여럿 있다. 다만 신 터널도 아무래도 개통 50년이 다 되어가는 노후 터널인지라 아예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할 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