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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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은 최시한의 소설이다.

전교조 탄압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허생전과 연관지어 투쟁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줄거리

‘나’는 고등학생이다. 글쓰기를 좋아하여 문예반에도 들었다. 사춘기 소년답게 옆 반의 이경미라는 여학생을 K라고 제멋대로 명명(命名)하여 이상화시켜 놓고 짝사랑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입시 체제로 학생들을 몰아가며 '자율 학습'을 시키는 학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또 말을 더듬고 몸이 약해 곧잘 놀림감이 되는 윤수를 이해하고 돕는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나는 매일 일기를 쓴다. 노트 필기는 하지 않더라도 편지나 일기만큼은 반드시 쓰는 나이다.


같은 반 윤수가 운동장 조회 중간에 갑자기 쓰러져 나는 윤수를 업고 양호실에 갔다. 윤수는 몸이 약한 아이이다. 말도 더듬는다. 윤수를 양호실에 눕혀놓고 나오려고 하는데, 윤수가 옆에 있어 달라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며칠 지나서 윤수는 하교길에 나에게 빵을 먹지 않겠냐고 한다. 나는 윤수와 함께 빵집에 간다. 윤수는 빵집에서 어렵게 말을 꺼낸다. 그것은 국어 시간에 왜냐 선생님께서 내 주신 숙제를 봐 달라는 것이다. 숙제는 <허생전>의 줄거리를 잡아오는 것이었다. 윤수의 숙제를 보는데,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서 허생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버렸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 때부터 나는 윤수를 다시 보게 된다.


왜냐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계속해서 ‘왜 그러느냐?’라는 질문을 하신다. 그래서 왜냐 선생님이시다. 왜냐 선생님은 국어 시간에 <허생전>을 가르치시면서 우리들이 허 생의 모습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셨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던 왜냐 선생님의 <허생전> 수업은 두 번으로 끝나게 된다. 왜냐 선생님께서 전교조에 가입해서 교장 선생님과도 싸우고, 결국에는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왜냐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나셨지만 정작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윤수는 땡볕이 쏟아지는 누우런 운동장 한 가운데 앉아서 무릎 앞에 무어라 적힌 종이를 세워놓고 앉아 있다.

구성

◆ 발단 : 운동장 조회 시간에 윤수가 실신함.

◆ 전개 : ‘나’가 윤수의 <허생전> 숙제를 봐 줌.

◆ 위기 : 수업 시간에 <허생전>에 대해 토론함.

◆ 절정 : 왜냐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과도 싸우고, 학교에서 쫓겨남.

◆ 결말 : 운동장 한가운데서 윤수가 무어라 적힌 종이를 세워놓고 항의함.

등장 인물

◆ 나(선재) : 독서를 좋아하고 글을 잘 쓰는 예민한 소년으로, 관찰자적 입장에서 일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교실에서의 일을 기록한다. ‘윤수’의 입장을 지지하는 태도를 취하나 머릿속이 복잡할 뿐 명쾌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 왜냐 선생님 :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주려고 노력하는 실천적인 교육자.

◆ 윤수 : ‘왜냐 선생님’의 수업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말을 더듬지만 개성적인 생각을 할 줄 알고,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는 용감한 소년.

◆ K : ‘나’(선재)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소녀.

◆ 동철 : 현실에 안주하는 생각을 하고, 평균적인 생각을 지향하는 소년.

정리

◆ 갈래 : 연작 소설, 단편 소설, 성장 소설, 교육 소설, 일기체 소설

◆ 배경 :

    ▷ 시간적 → 전교조 투쟁이 한창이던 1990년대 초반.

    ▷ 공간적 → 한국의 교육 현장.

◆ 시점 : 일인칭 관찰자 시점

◆ 의의 : 일기체 형식으로 씌어진 이 연작소설은 여전히 열악한 우리 교육의 현장에서 예민하고 젊은 영혼이 겪는 번민과 방황을 섬세하게 추적하고 있는 교육소설이다.

◆ 주제 :

    ▷ 현실에 대해 인식해 가는 사춘기 소년들의 정신적 성장.

    ▷ 허생전을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을 통한 삶과 사회 읽기

논평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은 작가 최시한의 연작소설집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수록된 단편이다. 이 작품은 7월 1일부터 시작하여 7월 14일까지의 일기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기 기록자는 학교 교지에 글을 많이 발표한 경력이 있는 ‘나’이다.


이 소설을 통해 ‘나’에 대해 획득할 수 있는 정보는 ‘나’가 고등학교 남학생이라는 것, 글쓰기와 글읽기 능력이 남들처럼 평범하지 않다는 것, 등수가 매겨지는 학교 공부에 그리 관심이 없다는 것, 그리고 한 여고생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며, 무엇보다 ‘나’는 자신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학교 내외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개입자로 자처하기보다는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관찰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 가운데 가장 주목하여 볼 수 있는 것은, ‘나’가 사건 개입자가 아니라 아닌 사건 관찰자라는 점이다. ‘나’는 ‘왜냐 선생님’이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되었을 때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뜻밖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당사자, 즉 사건 개입자는 ‘나’의 병약한 말더듬이 친구 ‘윤수’이다.


‘왜냐 선생님’은 교과서의 <허생전>을 지식 전달의 방법으로 강의하지 않고 의사 소통의 방법으로 강의하며 대화한다. 다시 말해, ‘왜냐 선생님’은 허생전이라는 텍스트를 두고 수많은 해석자들이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에서 허생전 읽기는 책읽기가 인간의 마음 읽기이며, 시대나 사회 읽기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왜냐 선생님’이 허 생이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허 생의 과거의 삶이 아닌 ‘현재의 삶’이다. 허 생은 자기가 선비 또는 사대부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는 지식인이었고, 그런 의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패배하고 만 인물이었다. ‘왜냐 선생님’의 <허생전> 해석은 당시의 사회를 비판했지만 그런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적극적인 실천의지가 결여되었던 인물이 바로 허생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통해 ‘왜냐 선생님’은 전교조에 가입한 자신의 의지를 다시 확인함과 동시에 학생들에게도 실천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강조한다. 그러나 허생을 통해 당시의 사회 상황에 대해 접근하려던 ‘왜냐 선생님’의 수업시간은 계속되지 못한다. 그는 학생들이 자유롭고 개성적인 해석자가 되어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희구하며, 이러한 교사의 바램에 가장 민감히 반응한 학생은 ‘윤수’이다. 윤수는 허생전의 허생을 두고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서 허생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버렸다”는 독특한 해석을 내린다. 이러한 윤수의 해석은 <허생전>을 돈과 권력으로 이해하는 해석과는 대조를 이룬다.


‘동철’ 등이 <허생전>을 경제와 관련된 텍스트로 이해하는 경향을 대표한다면, 윤수는 그와는 정반대의 자리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윤수의 해석이 절대적인 타당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 자기 나름의 개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윤수의 허생전 해석이 높게 평가되어야 하는 까닭은 그 해석이 논리적 완결성이나 의미의 결속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윤수의 해석이 제도 교육의 논리를 창조적으로 반박하는 자기 개성적인 해석이어서 그렇다. 윤수라는 예기치 않은 인물이 보여 주는 ‘항의’의 행동을 통해 작가는 소설을 마감한다.


우리는 ‘항의’의 행동을 펼치는 윤수에게서 현실의 시시비비를 따져 묻는 지사의 이미지보다는 한 예민한 영혼을 소유한 눈물겨운 반항아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의 반항은 소기의 목적을 획득하기 위한 반항이 아니라, 전체 동료들로부터 비난받는 반항이고 다른 교사들로부터 “퇴학당하고 싶어서”라는 욕는 듣는 반항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독자를 편안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계속 생각하고 반성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최시한은 인간과 제도 사이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문제에 좀더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5편의 연작소설이 실려 있는 최시한의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문학과지성사)에서는 ‘나’(선재)를 중심으로 학교 자체의 권력이 학생들에게 작동하는 모양들이 주로 직조되고 있다. 이런 권력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가 바로 ‘철학자’라는 별명이 붙은 ‘나’이다. 이 별명은 시험에도 안 나오는 문제에 골몰하는 아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나’는 노트 필기는 하지 않으면서도 편지나 일기만큼은 반드시 쓴다. 고백은 곧 성찰이고, 성찰이 곧 철학이니까. 하지만 ‘질서를 지키자’라는 종류의 글은 쓰기 싫어한다. ‘학생들한테 그렇게 시키라고 하면 물불 안 가리고 그래도 시키는 질서. 글을 짓는 건 수업이 아니고 교과서의 글을 읽어 외우는 것만이 수업인 질서. 아니오는 대답이 아니고 예만이 대답인 질서. 그런 질서들의 질서. 그런 질서의 질서의 질서’("구름 그림자", 26쪽)만 강요하는 것이 그런 글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서만 강요하는 것은 학교에 ‘왜냐 선생’같은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인물이 있어도 학교가 그 밖으로 내쫓기 때문이다. ‘왜냐’라는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면서 주체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요하는 왜냐 선생의 수업방식에 가장 잘 어울리는 교재는 ‘허생전’이다.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에서 허생전 읽기는 책 읽기가 인간의 마음 읽기이며, 시대나 사회 읽기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왜냐 선생이 허생이라는 인물을 통해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허생이 살았던 과거의 삶이 아닌 현재의 삶이다. 허생은 자기가 선비 또는 사대부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패배하고 만 인물이었다. 당시의 사회를 비판했지만 그런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적극적인 실천의지가 결여되었던 인물이 바로 허생이라는 것이 왜냐 선생의 해석이다. 이를 통해 왜냐 선생은 전교조에 가입한 자신의 의지를 다시 확인함과 동시에 학생들에게도 실천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강조한다.


그러나 허생을 통해 당시의 사회 상황에 대해 접근하려던 왜냐 선생의 수업시간은 계속되지 못한다. 학교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보수적이고 순응적인 교사가 이끄는 주입식 수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학교는 학교가 아니라 병원이나 군대, 국가와 같다. 보호나 질서라는 미명하에 억압이나 폭력이 저질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학교가 '꼭두각시 놀음하는 극장'("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46쪽)이거나 '수용소나 경마장'("섬에서 지낸 여름", 203쪽)과 같다. 그곳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곳이 아니라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를 가르쳐주는 곳이다. 그래서 학교의 권력은 부정이나 금지에서 발생한다.


이때의 학교의 모습은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한 지점에서 모든 내부가 환히 보이는 원형 감옥인 파놉티콘(Panopticon)과 유사하다. 보이지 않는 규율에 의해 감시받고 있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스스로 규율을 지키게 되는 곳이 바로 학교이기 때문이다. 이런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해방을 가져오는 수단이 아니라 감시나 구속, 처벌의 도구에 해당한다. 비이성적이거나 눈에 보이는 권력은 차라리 덜 무섭다. 이성적이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조정당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권력을 싸워야 할 적이 아니라 믿음직한 동지로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모두 본래부터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이런 폭력에 대해 작은 반란이나 반항을 시도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가장 강하게 연상시키는 "반성문을 쓰는 시간"에서 '나'를 비롯한 친구들이 경찰의 감시를 받는 반체제 인사의 집에서 축제 혹은 놀이판을 벌임으로써 얻고 싶었던 것은 음악과 춤, 명상이나 만남 등을 통해 서로 하나가 되는 체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온집회로 규정되면서 무기정학이나 반성문 쓰기라는 통제나 제재를 부른다. 복종이나 순응만을 원하는 학교 사회의 권력에 도전하면서 그 권력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런 권력의 대표적인 희생자가 반란 때문에 학교로부터 쫓겨난 윤수이다. 왜냐 선생이 학교에서 쫓겨날 때 유일하게 침묵 시위를 했던 윤수에게는 생물 시간에 배우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자연의 조화가 아닌 이기고 지는 살벌한 경쟁의 문제로 파악된다. 그래서 그가 고3 선배들의 대입 합격을 기원하는 기원의 밤에서 더듬거리며 한 말, '우, 우, 우리는 마, 마라톤 선수, 선수가 아닙니다. 모, 모두 승리, 승리하면 누가, 패, 패배합니까?'("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151쪽)는 아름다웠던 아이들이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경쟁과 이기심, 규율의 문제를 흠집내는 도발적인 언어에 속한다.


이런 상황이기에 "섬에서 지낸 여름"에서 윤수가 찾아 떠나는 '두레학교'라는 곳이 의미깊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윤수가 '대망 아카데미'라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내세우는 학원에서 뛰쳐나와 자유와 상호 이해가 존중되는 곳을 향해 떠나는 결말이 절실하게 느껴지면서도 위험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왜 모든 좋은 것은 그토록 요원하게만 느껴질까. 왜 결국에는 그런 이상의 실현 가능성이나 희망에 대해 의심하거나 회의를 품어야만 할까. 그것이 이 시대의 소설들을 읽는 독자의 슬픔이다. 진부하고도 원론적일 수도 있는 이 이야기가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학교 자체가 여전히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학교에는 학생이 없다.

질문과 답변

1. ‘허 생’과 ‘왜냐 선생님’이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허생은 자기가 선비 또는 사대부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패배하고 만 인물이었다. 당시의 사회를 비판했지만 그런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적극적인 실천 의지가 결여되었던 인물이 바로 허생이라는 것이 왜냐 선생님의 해석이다. 이를 통해 왜냐 선생님은 전교조에 가입한 자신의 의지를 다시 확인함과 동시에 학생들에게도 실천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강조한다.


2. 이 소설이 왜 사춘기의 소년이 당대의 교육 현실에 대해서 고민하게끔 설정해 놓았다고 생각하는지 말해 보자.


  ☞ 이 소설의 설정은 사춘기 소년의 정신적 방황과 고민을 통해 현실에 대한 이해와 옳고 그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성숙하게 할 수 있게 한다.

참고

<참고사항 1> - 작가 : 최시한(崔時漢)


  1953년 2월 28일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문과대학 인문학부 국어국문학전공 교수d이다.


  1982년 <우리 세대의 문학> 1집에 <낙타의 겨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그는 섬세한 언어 감각과 정교한 구성으로 따뜻한 감동을 주는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일기체 형식으로 쓴 연작 소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에서는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시선과 감성으로 세상의 모습을 부각시켜 어른들의 세계를 낯설 게 만들어 보여주는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집 <낙타의 거울>(1992), 연작 소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이 있다. 그외 문학과 문학 교육관련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다.


<참고사항 2> - <허생전>을 통해 생각해 보는 ‘지식이란 무엇인가’

"소위 사대부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오랑캐 땅에 태어나 자칭 사대부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 받는 신하라 하겠는가? 신임 받는 신하라는 게 참으로 이렇단 말이냐? 너 같은 자는 칼로 못을 잘라야 할 것이다."

<허생전>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지은 <열하일기>의 <옥갑 야화>에 실린 총 7개의 삽화 중 마지막 삽화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이 부분은 <허생전>에서 허생이, 말로는 어진 인재를 구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려 들지 않는 이완 대장, 곧 사대부를 꾸짖는 대목이다. "너 같은 자는 칼로 목을 잘라야 할 것이다."라는 허생의 호통에 겁먹은 이완 대장은 들어온 문으로 나가지 못하고 뒷문으로 줄행랑을 치고 만다.


이 광경은 박지원의 또 다른 한문 단편 <호질>에 나오는, 온몸에 똥칠을 한 채 땅에 엎드려 호랑이에게 갖은 아부를 하는 북곽 선생의 모습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 이것은 그 당시 사대부에 대한 박지원의 엄준한 단죄(죄를 처단함)이자 양반의 희화화를 통한 풍자이다. 이렇듯 <허생전>은 그 당시 지배 계층인 양반 사대부에 대한 비판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


최시한의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은 박지원이 <허생전>을 통해 제기한 사대부의 문제를 오늘의 문제로 되살리고 있다. 박지원이 살았던 당시 사대부들은 사회지배층이자 지식인이었지만, 아는 것을 실천해 백성을 바른 길로 이끄는 '참된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허위 의식에 빠져 공리공론(실천이 따르지 않는 헛된 이론)만을 늘어놓고 명분에 얽매여 북벌을 주장하고 당쟁을 일삼는,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였다. 허생이 '글을 아는 자' 곧 지식인이 화근이 될 수 있다며 그들을 모두 섬에서 데리고 나온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은 이처럼 지식인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해 '소위 사대부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라는 질책을 듣는 조선 후기의 상황을 오늘날의 문제로 가져와 '참된 지식인, 참된 지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왜냐 선생'의 말을 통해 선명히 드러난다. 허생은 사대부의 허위와 명분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나 왜냐 선생은 허생의 소극성을 비판한다.

"허생은 장사해서 돈을 벌고 그걸로 가난한 백성들을 돕지만, 항상 선비로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는 한 번도 선비의 자리, 양반 사대부라는 자리를 떠난 적이 없다 그 말입니다. 허생은 장사를 하지만 장사꾼을 경멸하고 백성을 돕고 북벌책 같은 국가 대사를 논하지만 조정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그것을 실천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사농공상으로 구별하던 당시의 규범, 때가 아니면 초야에 은둔한다는 선비의 처세관에 묶여서 거리를 두고 비판하거나 도와 줄 뿐, 하나가 되어 함께 살고 책임지지는 않는 겁니다. 이점이 바로 허생의 한계요 <허생전>을 지은 연암 박지원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를 비판했던 선각자 허생은 오늘날에 와서 그 실천의 소극성 때문에 자신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은 사대부를 비판하는 <허생전>을 통해, 사대부뿐 아니라 나아가 사대부를 비판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혁하려 하지 않는 허생의 소극성까지 문제로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은 참된 지식이란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실천을 통해 삶 속에 녹아들어야만 한다는 평범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진리를 다루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즉 소설의 형식 또한 이채롭다. 소설의 세계는 화자인 '나'의 일기를 통해 드러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남들은 즐겁게 사는데 나만 그러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만한 뾰족한 이유"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차라리 "어디 심하게 아프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 "똑같은 노릇을 날마다 되풀이하면서 다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라고 생각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한다. '나'는 한마디로 단순 명료하지 못한 "머리 속이 복잡한 크로마뇽인"이다. 지식을 배워 가는 과정에 있는 청소년기의 '나'는 부단히 생각하고 살피는 성찰의 형식인 일기를 통해 복잡하게 얽힌 사유의 실타래를 풀어 보려 애쓴다.


그런 '나'의 의식 한편에서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윤수이다. 윤수는 말을 더듬는다. 그래서 자신의 속내를 시원스럽게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진지하고 자신의 생각에 충실하다. 그에겐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괴리(서로 등져 떨어짐)가 없다. '나'가 부단히 고뇌하고 회의(懷疑)하는 사색가라면, 윤수는 자신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과묵한 실천가라 할 수 있다. 왜냐 선생이 교사 노조와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학교측으로부터 등교를 제지당하자, 윤수는 ‘땡볕이 쏟아지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홀로 주저앉아’ 학교의 부당한 처사에 온몸으로 항의한다.


윤수의 이러한 행동은 ‘전보다 더 잘 가르치기 위해서’ 교사노조를 결성하려는 왜냐 선생의 행동과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신이 가는 "길이 어디로 향한 것인지 살펴보고, 필요하다면 새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실천의 논리 속에서 그들은 만나게 된다. 이 대목은 명(明)나라 유학자 왕양명(1472∼1528)의 지행 합일설(알면 반드시 실천하여 지식과 행동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 실천이 없는 지식이란 참된 지식이 아니다. 진정으로 안다면 실천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윤수와 왜냐 선생은 참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것과 더불어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은 작품 속에서 소재로 삼고 있는 <허생전>을 읽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문학 또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도 살피고 있다. 왜냐 선생은 "말 속에 또 말"을 품고 있는 것이 소설이기에 그것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읽어 넣는" 행위를 통해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행동의 앞 뒤 관계를 따지고, 인물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여러 가지 관련 지식과 사실들을 참고해" "진실"을 발견해 내는 것이 독서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말은 반대로 작품에 진실을 담아 내는 것이 문학 창작의 목적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은 고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의 풍경을 통해 지식과 문학의 진실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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