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데 사고
독일어: Der ICE-Unfall von Eschede
영어: Eschede train disaster
1998년 6월 3일, 독일 니더작센 주 에셰데에서 발생한 고속철도 탈선사고. 사망 승객 99명+인부 2명, 중상 88명으로 공식적으로는 고속철도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 1위다. '공식적'이라는 전제가 붙은 이유는 중국철로고속에서 발생한 원저우 고속열차 추락 사고의 사망자 수가 축소 발표되었다는 의혹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에서는 아직까지도 축소 발표를 했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로 철도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 공식 1위는 2004년 스리랑카 쓰나미 열차 탈선 사고이다. 물론 이것도 공식적으로는 이거고, 비공식적으로는 북한의 여러 열차 사고가 더 많은 사망자 수가 나왔다는 의혹이 있다.
사고의 원인
대한민국의 경부고속철도 수주전에도 참가한 바 있는 ICE 1은 쾌적한 승차감을 추구하며 일본과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고속철도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추구하던 것과는 달리, 식당칸이 심하게 흔들려 찻잔과 와인잔이 쏟아질 정도였고 소음도 심해 승객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차량 제작사인 지멘스와 운영사인 도이치반은 신차를 운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판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고민에 빠진다. 원래는 진동과 소음 감소에 좋은 공기스프링을 사용해야 했지만, 비용 절감을 위해 기존에 사용하던 강철 스프링을 사용한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공기스프링을 사용하기 위해 차량을 재설계하자니 돈도 많이 들었고 공업강국이라는 독일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될 판이었다.
그래서 진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고무가 삽입된 바퀴로 교체하기로 했다. 즉, 일체성형제작 방식을 포기하고, 금속 외피(테이퍼)를 씌우는 방식을 도입하여 바퀴의 크기를 줄인 후 바퀴와 외피 사이에 고무 흡진재를 부착하여 진동과 소음 문제를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고무 흡진재 바퀴에는 아래와 같은 문제가 있었다.
- 차륜을 두 쪽으로 쪼개면서 원래 서로 짝이 아니던 차륜도 마구잡이로 짝지어 차륜을 제작하였다.
- 차륜의 연결부를 제대로 정비하지 않으면 금속 피로가 누적되며 언제든지 테이핑이 풀리면서 차륜이 고장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바퀴를 철저히 점검하면 해결할 수 있지만 점검 또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 철제 부분 뿐만 아니라 안에 집어넣은 고무의 마모 상태도 철저히 점검해야 하였으나 제대로 점검하지 않았다.
- 차륜에 고무 흡진재를 부착한 이후 사고 발생까지 점검은 이뤄지지 않았고, 다음 정비까지의 운행시간 자체가 지나치게 크게 잡혀 있었다.
- 이중 구조의 차륜에 대한 고속주행시 안정성 검증이 되어 있지 않았다. 하노버에서 노면전차 등 대중교통을 운영하는 회사인 üstra사가 1997년 가을에 외피 분리식 이중 차륜이 심각한 금속 피로를 일으키더라는 내용을 역내 철도회사들에 이미 전파한 사실이 있었는데 이 회사의 금속 피로도 검증결과는 24 km/h로 얌전하게 운행하는 시내 노면전차에 이를 도입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허나 그에 대한 도이체반의 공식 회신은 "우리 열차에서는 그런 일 없음"이 끝이었다.
이렇게 고무 흡진재가 부착된 바퀴 자체가 가진 문제점과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점검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에 언젠가는 대형 사고가 발생할 수 있었고, 결국 최다 인명 피해를 일으킨 고속철도 사고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사고 과정
1998년 6월 3일, 뮌헨발 함부르크행 51편성 ICE 884호 열차는 뮌헨을 출발해 아우크스부르크 - 뉘른베르크 - 뷔르츠부르크 - 풀다 - 카셀 - 괴팅겐 - 하노버를 거쳐 함부르크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노버까지 순조롭게 도착한 열차는 종착역인 함부르크로 가기 위해 계속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함부르크까지 130 km 남겨둔 상태에서 재앙은 시작됐다. 첫번째 객차의 세 번째 바퀴의 외피가 금속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끊어지며 바퀴를 둘러싸고 있던 외피가 직선으로 펴지면서 객실 바닥을 뚫고 객석 팔걸이 한가운데까지 밀려 나오는 사태가 발생했고, 외피가 떨어진 좌석에 앉아있던 승객은 깜짝 놀라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뒤 이를 승무원에게 알리기 위해 객석 끝에서 객석 끝까지 먼 여행(?)을 시작했다. 승객은 인터뷰에서 그 시간이 하루종일 걸리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승객은 간신히 승무원을 만나 무언가가 바닥을 뚫었다고 설명하며 기차를 멈추라고 얘기했지만 승무원은 자기가 직접 상황을 봐야겠다며 승객의 부탁을 거절했고, 승객이 자리를 뜬 지 몇십 초 뒤에 사고가 발생했다.
문제의 ICE는 그 곳으로부터 함부르크에 도착할 때까지 통과해야 하는 두 개의 분기기 중 첫 번째 분기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분기기엔 여기저기로 교차해 가는 선로가 어지럽게 산재해 있었고 이 곳을 통과할 때 끊어진 강철외피가 분기기의 철로와 부딪쳐 교차로의 철로를 들어올렸고 들어올려진 철로가 1번 객차의 천장까지 뚫어버리며 기차를 공중으로 띄워버렸다. 이 충격으로 동력차의 바퀴가 탈선해 선로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상태까지 도달해버렸다. 이때 ICE는 200 km/h의 속도를 내고 있었다.
곧 몇초 후 ICE는 근처의 에세데 마을과 가까운 두 번째 분기기에 도달했는데 여기서 탈선 된 동력차의 바퀴가 분기기 포인트를 강타하여 다른 방향으로 돌려버렸고, 뒤따라오던 객차들이 모조리 튕겨나가 마침 옆에 있던 다리에 부딪쳐 차곡차곡 쌓이면서 생지옥이 연출되었다. 앞서 가던 동력차는 뒤따라오던 열차가 끊어진 것 외엔 아무런 피해가 없어 사고 지역에서 약 3km를 더 가고 멈췄으나, 탈선한 ICE 차량은 다리와 충돌해 다리가 붕괴됐고, 사고 현장 바로 옆에서 작업을 하던 인부 두 명이 휩쓸려 즉사, 400명의 승객 중 99명이 사망하고, 88명이 중상을 입은, 공식적으로는 세계 고속철 역사상 최악의 사고로 기록되었다.
에세데 마을에 사는 어떤 할머니는 갑자기 밖에서 굉음이 들려 현관문을 열어보니 박살난 객차 잔해들이 바로 자기 집 마당에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만약 사고가 약간만 더 앞 쪽에서 일어났다면 그 집 역시 사고에 휩쓸렸을 지도 모른다.
사고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식당 칸이었다. 식당칸이 다리에 가장 많은 부분이 깔리면서 50cm 두께로 줄어버렸다. 사고 신고를 받고 온 소방관과 경찰관, 인근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 구조에 나섰고 근처 마을회관은 임시 시체 안치소로 운영해야 했다.
사고 조사
처음 사고를 접했을 때 독일 언론들은 에세데 마을 근처의 교량에서 추락한 자동차가 열차를 덮쳐 사고가 났다고 보도했고 그게 맞을 것이라고 우겼다. 하지만 조사결과 이는 사실이 아니었으며, 도이체반이 그 동안 손전등 한 번 비춰보고 마는 무성의한 정비를 했음이 드러났다.
고속철도의 차륜은 고속주행으로 인한 금속 피로나 균열 문제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한국의 KTX는 기존선과 고속선을 함께 주행해 두 레일 두께 차이로 인한 마모문제에 굉장히 신경을 쓰기 때문에 주행 후 전 객차의 차륜의 마모상태를 하나하나 측정 공구로 측정하여 항상 기록하며, 차륜이 마모한도가 다 되었다면 객차를 들어올려 차륜을 탈거하고 새 차륜을 장착해서 쓴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 한다. 문제는 도이체반에서는 이런 정비는 커녕, 이후에도 대충대충 정비해서 난 사건 사고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고 이후
결국 도이체반은 피해자 및 사망자 유족들에게 총합 3000만 달러에 이르는 배상금을 물어야 했으며, 전 차량의 바퀴를 다시 일체성형식으로 바꾸었다. 그 외에도 도이치반의 임원 두 명과 엔지니어 한 명이 니더작센 주 검찰에 의해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대륙법계 사법 체계에서는 이러한 참사에서 원인제공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상당히 취약하기에, 재판장의 제안으로 주 검찰과 피고는 사법거래를 벌여 인당 10,000유로의 벌금을 무는 조건으로 기소를 취하했다.
사고 당시 구조에 참여했던 인근 마을에선 사고 구조작업에 참여했던 사람 중 트라우마를 호소한 사람이 많았고, 이에 인근 마을에 트라우마 담당 의사가 파견되어 트라우마를 겪던 주민들을 몇년간 상담해주고 치료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