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포트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비서이자 정부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សាឡុត ស, Saloth Sâr). 폴 포트(ប៉ុល ពត, Pol Pot)라는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어 Politique Potentielle(영어로 Political potential, 정치적 잠재력)에서 따 왔다는 설이 있다.
킬링필드로 불리는 학살을 주도한 인물로, 피비린내 나는 세계 근현대사에서도 최악의 학살자로 손 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이자 캄보디아 전체를 황폐화시킨 최악의 독재자이다. 그가 세운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몰락한지 40년이 넘은 지금도 캄보디아는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의 어두운 잔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철도 환경이 몰락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지금은 다시 복구되고 있지만..
생애
집권 이전
1925년 5월 19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어촌 마을인 쁘렉스버우(ព្រែកស្បូវ, Prek Sbauv)에서 아들 7명과 딸 2명 중 8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참고로 쁘렉스버우는 현재 캄퐁톰 성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살롯이라는 성은 나중에 붙은 것으로, 훗날 프랑스가 모든 크메르인들에게 성씨를 부여하는 식민 정책을 시행하면서 붙게 되었다.
폴 포트의 가족은 조상중에 중국계 혈통이 섞였지만 폴 포트의 대에 이르러서는 크메르인들에게 완전히 동화되어 중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당시 폴 포트의 아버지는 12헥타르의 땅과 버팔로 6마리를 소유했고, 그의 농지의 연평균 수확량은 20명 이상의 가족을 기를 수 있는 6t 정도였다고 할 정도로 살롯 사의 집안은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부농이었다. 형 중 한 명은 왕궁의 관방실 서기관이었으며 여기에 사촌누나 메악이 시소와트 모니봉(ស៊ីសុវត្ថិ មុនីវង្ស) 왕자의 첩으로 들어갔다. 모니봉이 1927년 왕위에 오르자 메악은 사실상 왕비가 되었고 1930년에는 이복누나 로응이 모니봉의 다른 후궁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살롯 사의 가문은 잘 사는 집안은 물론이고, 왕족와 연결된 지배 계층 집안이었고 이 덕분에 살롯 사는 상당히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훗날 이 인간이 한 행보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배경이다.
어찌되었든 아버지 살롯 뻰은 살롯 사에게 서양식 고등교육을 시키기로 마음먹고 맏형 수옹과 같이 프놈펜으로 보낸 뒤 캄보디아 전통대로 여섯 살 때 왕실 불교사찰인 왓보뚬(វត្តបទុម)에 들어가 사미(沙彌)로 교육받은 뒤 1935년 9월 가톨릭계 학교인 미셰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시절 성적은 형편없어서 원래 6년 과정인 미셰학교를 유급해 43년에야 졸업했다. 살롯 사는 당시 캄보디아의 유일한 중등 교육기관인 시소와트 고등학교에 입학하려 했지만 낙방하였고, 운 좋게도 막 신설된 깜뽕짬 근처의 프레아 시아누크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시절에도 성적은 제법 나아졌지만 바이올린과 축구, 농구를 좀 잘한다는 것 말고는 크게 특출나지 않았다. 당시 살롯 사는 예의 바르고 유머 감각이 있고 잘 웃는 데다가 '병아리 한 마리 해치지 못하는 아주 귀여운 아이'였다고 한다.
그렇게 1947년 살롯 사는 중학교 생활을 마친 뒤 예전에 떨어졌던 시소왓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살롯 사의 중학교 시절 성적은 중간 정도였는데 그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정말 예외적인 경우였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살롯 사는 운 좋게 입학은 했지만 48년 진학시험에는 떨어졌고 공업학교인 프놈펜 기술학교에 목공반으로 편입했다. 근데 이때도 재수가 터졌는지 당시 이 프놈펜 기술 학교에서는 성적 우수자 3명을 프랑스 대학에 국비 유학생으로 보내 주었는데 살롯 사가 편입한 그 해에 5명으로 유학 대상이 늘었고 살롯 사는 과거 학교에서 쌓아둔 지식 등을 통해 49년 여름에 국비 장학생에 선정돼 프랑스 유학 길에 올랐다.
1949년 10월 사는 프랑스 파리의 프랑스무선공학학교(École Française de Radioélectricité)에 국비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때 먼 친적이자 친분이 있던 시소와트 소모노퐁(ស៊ីសុវត្ថិ សុម៉ោនពង្)이 먼저 입학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살롯 사의 매형이자 선대 왕인 모니봉 왕의 조카로의 후궁인 누나 덕에 친분이 있었다. 소모노퐁의 도움으로 폴 포트는 파리의 부촌인 아미요 가에서 지방장관의 아들들과 같이 하숙했다. 이후 소모노퐁의 권유로 크메르학생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이 시작되고 이과정에서 이엥 사리, 손 산, 키우 삼판 같은 훗날 크메르 루주 지도부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11월 켕반삭의 집에서 하숙하게 된다. 그리고 51년 중순쯤 공산당 세포조직인 마르크스클럽을 거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을 시작했다
파리 시절 친구들 가운데 폴 포트와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훗날 크메르 루주에 의해 처형되는 서구 지향적이고 개방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과는 다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의 차이는 필명에서부터 나타났는데, 다른 동료들이 ‘자유 크메르’나 ‘크메르 노동자’ 같은 이름을 선호한 데 반해 폴 포트는 ‘순수 캄보디아’ 같은 필명을 고집했다.
살롯 사는 세 차례나 낙제한 끝에 1953년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프랑스군의 탄압에 맞서 캄보디아 독립 운동이 시작되던 상태였는데, 이에 살롯 사는 형제인 살롯 차이(សាឡុត ឆ័យ, Saloth Chhay)를 따라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면서 폴 포트로 알려지게 된다. 30대 초반에 폴 포트는 사립 학교에서 역사, 지리, 프랑스어 문학, 도덕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했는데 교사로서의 폴 포트는 훌륭한 교사였다고 한다.
1956년에는 바칼로레아를 통과한 최초의 캄보디아 여성이었던 키에우 뽄나리(ខៀវ ពណ្ណារី, Khieu Ponnary, 1920–2003)와 결혼했으나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공산주의, 반외세 운동에 참여한 이후 베트남의 반불 저항 운동에 동참하며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절 친구, 동료로서 이후 크메르 루주와 거리를 둔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잔혹한 성격이라든지 음흉한 면은 없었다고 하며 과묵하고 예의 바르며 수더분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적어도 이 시절에는 조국을 생각하고 외세로부터 조국을 구하자는 순수한 면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베트남 사람들과의 충돌과 갈등으로 베트남과 손잡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으며 캄보디아가 독립하고 한때 교사로 착실하게 지내던 적도 있지만 서서히 반왕정 활동을 하면서 시아누크 비밀경찰에게도 수배 대상이 되어 밀림으로 잠적했는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소수 원주민들과 친해지면서 이를 계기로 공동체 의식, 나아가 독자적인 공산주의 정신을 가진 나라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다.
1960년대 중후반 베트남 전쟁 와중에 소수 원주민들이 주역이 된 공산당 분파이자 '붉은 크메르'라는 의미를 지닌 조직 크메르 루주(Khmers rouges, 크메르어로 크마에 끄라함 · ខ្មែរក្រហម) 창설에 기여했다. 나아가 북베트남과 중국의 지원 아래 무력 저항으로 캄보디아 왕정에 맞섰다.
이 무렵 크메르 루주는 미미한 세력에 지나지 않았으나 론 놀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에 맞서고자 여러 세력을 끌어들이려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 덕에 무기 지원 및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하는 물자 운송로인 호치민 루트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지났기 때문에 미군이 캄보디아에 마구잡이 폭격을 하면서 국경에서 많은 사망자를 내자 국경에 살던 많은 소수 원주민들이 분노하여 크메르 루주에 들어오면서 갈수록 세력이 커져가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의 지지까지 크게 얻었다.
이 폭격은 캄보디아 중부 및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국경 지대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프놈펜으로 몰려들게 했다. 론 놀 쿠데타 당시 65만명이던 프놈펜 시민은 1970년 말 1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1975년에는 25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폭격이 많은 사망자를 내자 국경에 살던 많은 소수 원주민들이 분노하여 크메르 루주에 들어오면서 갈수록 세력이 커져가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의 지지까지 크게 얻었다.
론 놀은 부하들에게 뭔가 얘기를 하면 부하들이 항상 졸 정도였고, 반공주의를 내세워 미군이 일으키는 학살을 방조하고 군부에서도 학살 사건을 일으키며 민심이반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 상황에서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크메르 루주의 세력이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시아누크도 크메르 루주를 지지하며 더욱 입지가 커졌다. 결국 1975년 4월 17일에 폴 포트가 론 놀 군부를 뒤엎으면서 크메르 루주 정권을 설립했다. 이른바 민주 캄푸치아의 탄생이었다. 론 놀은 달아났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한 론 놀의 수하들과 가족들을 잡아다 학살한 뒤 그냥 내다버리고 공산당을 장악하고 공무원 및 군부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다음 반외세 및 반자본주의를 기조로 기존 '사회주의 국가'와 다른,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표명했으며 전 국민 머릿속에서 자본주의 요소를 없애 공산주의로 무장된 투사로 기르려고 했다.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할 당시 깊은 산골의 농민 출신의 12~13세 소년들이 대부분이던 크메르 루주의 병사들은 '한 번도 돈을 본 적도 없었고, 자동차도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것 같았으며' 돈에도 관심이 전혀 없어 미화 1만 달러가 든 보따리를 열어보고는 강물에 던져버렸으며, 생선 통조림통의 생선 사진을 보고 생선을 죽이는 독약으로 착각하는 순진한(?) 면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워낙 무표정하고 조용한 나머지 프놈펜에 있던 기자 디트 프란은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하자, 프놈펜에는 행복의 기운이 감돌아 젊은이들은 서로 얼싸안고 입을 맞췄으며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들은 크메르 루주의 프놈펜 점령이 '공포에 떨게 했던 로켓포 공격', '징병', '부패하고 지긋지긋한 이 정권'이 이제 끝났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프놈펜에 있는 모두에게 폴 포트가 세운 크메르 루주 정권 치하에서 시아누크 정권과 론 놀 정권 때보다 끔찍한 비극이 닥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집권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는 모든 인민은 농경 산업에 집중해야만 하며 나아가 위험이 되는 모든 요소, 대중문화 및 퇴폐하고 위험한 사고 방식을 가진 이들은 필요 없다라는 농업 중심의 완벽한 공산주의 국가정립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특히 폴 포트 본인의 롤모델인 마오쩌둥이 시행한 정책인 대약진 운동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다 못해 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시행했다. 애초에 대약진 운동과는 궤를 달리하던 것이, 어찌 됐든 도시와 농촌에서 사회주의적 조직과 증산을 노리던 대약진은 기본적으로 도농격차 극복을 목적으로 삼되 둘 모두의 발전을 도모하던 운동이었다. 동시기 이루어지던 하방 운동 역시 도시민을 다짜고짜 수백 만 단위로 내려보내던 것이 아니라 기존 지식인의 교화 혹은 공산당원의 일종의 파견&지방 독려를 위해 시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폴 포트는 국가를 유토피아로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면 수백만 명을 죽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먼저 폴 포트는 인민들의 생활을 너무 안락하게 하거나 반동분자들을 더 강력하게 통제하지 못하면 혁명은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자본주의의 산물인 도시로 보아 수도 프놈펜에 폭격이 떨어진다고 거짓말로 선동을 해 포함한 도시에 거주한 사람들을 내쳤고 심지어 병원에 있던 중환자까지 내보낸 뒤 이들이 가는 길을 군인들로 감시하여 강제로 집단 농장으로 이주시켰다. 이렇게 강제로 이주당한 '새 사람'은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했다고 한다.
개인의 사유 재산과 시장 경제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이전에 있던 화폐 제도는 폐지되었으며, 프놈펜 중앙은행은 폭탄으로 폭파되고, 총 62개의 은행이 습격된 후 모든 화폐와 장부는 불태워졌으며, 상점 운영도 금지되어 모든 물건을 물물교환과 배급으로 얻는 원시적인 경제구조로 돌아간 데다가 외국과의 무역은 전부 소멸되었고, 국가의 모든 영토는 국가와 집단농장이 소유하게 되었다. 크메르 루주의 관점에서 볼 때 캄보디아는 '2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외세의 경제적 지배에서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다.
한 술 더떠 크메르 루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물물교환조차 금지시켰고, 캄보디아 국민들이 가질 수 있던 '사유 재산'은 겨우 숟가락과 그릇 하나가 전부였다. 이렇게 캄보디아의 모든 국민들은 완전히 평등하게 가난해졌고, 이 당시 캄보디아의 지니 계수는 약 0.15라는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수치가 나오게 되었다. 한마디로 북한 정치범수용소 혁명화구역에 전국민을 가두어버린 격이었으며, 폴 포트 전기를 쓴 필립 쇼트(Philip Short, 1945–)의 말처럼 캄보디아에는 '현대 최초의 노예제 국가'가 열린 것이었다.
그리고 크메르 루주는 이제까지의 2천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앙코르 왕국보다 더 멋진 미래를 설계한다는 명분으로 2천년 역사 동안 캄보디아에 전해진 모든 것들을 부인하였다. 이를 위해 캄보디아의 새해인 4월 중순을 맞아, 1975년 4월을 모든 것이 무에서 시작된 0년으로 삼았는데, 0년 이전 사회에 대한 기록된 기억이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 책들을 대량으로 불사르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크메르 루주는 집단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국민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일상에서 쓰는 단어를 바꾸었는데, 실제로 크메르 루주는 크메르어에 있던 화자의 계급과 사회적 지위를 정의하는 복잡한 체계를 모두 금지하고 사람들끼리는 단순히 "친구" 또는 "동지"를 의미하는 '밋(mitt)'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권장했으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단수형 "나"가 아닌 복수형 "우리"로 말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도 각각 '포' / '메'로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어린이들은 자신의 친부를 "숙부" / "숙모"로 부르고 다른 사람을 "엄마" / "아빠"로 불러야 했다. 심지어 국민들은 일반적으로 성별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폴 포트는 학교가 자본주의를 가르친다고 보아 전국에 있는 학교들을 모두 강제로 폐쇄시킨 것은 물론, 그나마 교육을 시킨다 해도 문학과 과학 등 서구 문물을 가르치는 것은 엄금되어 기본적인 문해력과 수학, 혁명적 가치를 교육하는 것만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혁명적 가치 교육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없었는데, 당시 캄보디아의 악명 높은 뚜올쓸라엥 교도소에는 7 이상을 세는 방법조차 모르던 16 ~ 18세 정도의 청소년 교도관까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캄보디아는 외국의 도움 하나 없이 자립해야 한다는 이유로 캄보디아의 국경은 육상과 해상 관계없이 모두 봉쇄되었으며, 이동수단 보유도 금지되었고 국영 항공사였던 에어 캄보디아(Air Cambodge)도 완전히 폐쇄되었고 정기 국제항공편도 완전히 없어졌으며, 심지어 외국 대사관도 모두 폐쇄되고 대사관 직원들도 모두 쫓겨나면서 캄보디아는 알바니아, 적도 기니 이상으로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육지의 섬'이 되었다.
그리고 폴 포트는 1976년 5월 13일에 민주 캄푸치아의 정부총리에 정식으로 오르게 되었다. 사실 그 이전까지 민주 캄푸치아의 정부총리는 시아누크 시절에 여러 번 총리를 역임한 뻰 눗(ប៉ែន នុត, Penn Nouth, 1908–1985)이었으나, 실제로 뻰 눗의 실권은 전무하여 완전히 명목상의 총리에 불과했다. 물론 이 시기에 캄보디아의 공식적인 국가원수로 알려진 시아누크도 명목상의 국가원수에 불과했다.
크메르 루주 고위 수뇌부는 가족들을 전문성이 전혀 없는 요직에 앉히기까지 했는데, 대표적으로 국방장관 손 센(Son Sen, 1930–1997)의 부인인 윤 얏(Yun Yat, 1934–1997)은 교육부 장관과 정보부 장관을 역임했고, 폴 포트의 아내 키우 폰나리의 여동생이자 부총리 이엥 사리의 부인이었던 이엥 티릿은 사회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이엥 사리의 딸 중 하나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음에도 병원의 원장이 된 데다 이엥 사리의 조카는 영어를 거의 못했음에도 라디오 프놈펜의 영어 번역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민주 캄푸치아 치하에는 폴 포트의 조카들 중 일부도 외무부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폴 포트는 집권 초기의 2년 동안 외부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베일 속의 인물로 지내다가 1977년 9월 27일에 프놈펜의 올림픽경기장에서 한 연설에서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냈는데, 폴 포트가 이렇게 외부로의 노출을 꺼린 것은 비밀의 유지가 혁명의 기본원칙이라고 강조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폴 포트라는 가명은 1970년 7월부터 썼다고 하며, 그 외에도 폴 포트는 뿍(Pouk), 하이(Hay), 폴(Pol), 87, 형님, 99, 뻼(Pem) 등 수없이 많은 가명을 만들어서 그때그때 바꿔가며 활동했고,본인의 신상정보를 철저히 숨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짜 정보까지 만들어 흘리기도 했다. 실제로 폴 포트의 자기 은폐가 어찌나 철저했냐면 캄보디아의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폴 포트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마저 '폴 포트'의 출생일과 본명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캄보디아 공산당 총비서 살로트 사르'와 '폴 포트'가 동일 인물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심지어 그의 형과 누나마저 폴 포트의 직위를 1978년에 지방정부의 대형 식당에 남동생의 초상화가 걸린 것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
킬링 필드
삼촌, 저는 삼촌의 순수했던 교사 시절이 그리워요.
폴 포트의 조카가 킬링필드에 경악한 뒤에 쓴 글. 그의 아버지인 폴 포트의 형은 동생을 원망하며 자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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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포트의 이러한 괴상한 정책들의 시행으로 인해 민심은 당연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폴 포트는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이른바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홀로코스트로 인해 일어난 자국민에 대한 대학살을 "킬링 필드"라고 부른다.
학살 수법도 참혹하기 그지없었는데 크메르 루주는
인간을 살육하는데만 쓰잘데기없이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류가 탄생한 이래 그 이전에는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을 엽기적이고 피비린내나는 학살 방식을 선사했다.
이들이 쓴 가장 흔한 방법은 눈을 가린 뒤 팔을 뒤로 묶고 몽둥이를 이용해 죽이는 것이었는데 크메르 루주는 반동으로 낙인찍힌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묻힐 구덩이를 파게 하고 밖으로 나와 가장자리에 서게 한 뒤 몽둥이로 뒤통수를 쳐서 구덩이로 밀어넣어 죽였다고 하며 총알을 아끼기 위해 유난히 가시가 많은 설탕야자나무 몽둥이로 사람을 때리거나 손을 묶고 비닐 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시켰고 구덩이나 우물에 사람들을 산 채로 몰아넣은 뒤 밀폐해 죽이기도 했으며 심지어 사람들을 일렬로 세운 뒤 한꺼번에 창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이렇게 크메르 루주는 50명에서 1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집단을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것을 즐겼는데 어떤 경우에는 약 130명을 동시에 처형하기도 했다. 참수도 처음에는 칼로 하다가 나중에는 가시가 달린 나뭇가지와 날카로운 야자수 잎줄기, 줄기 가장자리로 했고 아예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것을 넘어 산 채로 타일 오븐에 넣어 죽이기까지 했다.
1996년 6월 7일에 타전된 방콕발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크메르 루주는 민간인 학살에 고압선을 이용한 전기고문과 물고문은 물론, 사람을 고문 침대에 눕혀 놓고 쇳덩어리로 머리를 짓누르는 방법도 사용했다고 한다. 게다가 반동으로 몰린 사람들이 과거 정권에 협조했다고 불지 않을 때는 도끼로 손을 자르거나 산 속 나무에 묶어 이 나무를 오르내리며 먹이를 찾는 열대 붉은왕개미들로 하여금 살을 파먹게 했으며 심지어 이들이 여성일 경우에는 민감한 부분들을 도려냈다고 한다. 고문은 주로 크메르 루주에게 세뇌당한 10대 위주의 고문기술자들이 맡았는데 이들은 고문 센터에서는 물론이고 사람을 죽이기 직전에도 고문을 가했다. 이들이 가한 고문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수감자들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기 전에 수감자가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을 정도였다.
크메르 루주의 고문 수법은 주먹질이나 몽둥이, 쇠파이프, 채찍, 전선 등으로 사람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거나 수감자의 팔을 뒤로 묶은 채 도르레로 끌어올려 어깨를 탈구시키거나 사람을 거꾸로 매단 후 오물이 담긴 바구니에 얼굴을 담그게 한 것 등이 있었다. 심지어 담뱃불이나 불에 달군 금속으로 사람을 지진 것조차 그나마 양반일 정도로 잔혹했는데 크메르 루주는 독이 든 지네와 전갈을 수감자들의 상처나 은밀한 부위에 풀어놓기도 했으며 사람을 철제 침대 프레임에 눕힌 뒤 자동차 배터리를 통해 전류를 신체의 민감한 부위에 집중적으로 흘려보내거나 처형자를 욕조에 넣고 욕조 안의 고리에 사지를 끼워 고정시킨 뒤 서서히 물을 채워 익사시키기도 했고 플라이어로 얼굴을 훼손한 뒤 그 위에 산을 붓기도 했고 심지어 전기드릴로 뒤통수를 뚫거나 거세를 넘어 디딜방아처럼 생긴 도구에 머리를 넣고 찧어 죽이는 참혹한 방법까지 있었다. 크메르 루주는 이렇게 처형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을 가리기 위해 나무에 매단 스피커로 선전가들을 요란하게 틀었고 처형한 시체에는 DDT를 뿌려 시체의 냄새를 가렸으며 심지어 DDT를 집단 무덤 속에서도 간신히 살아남았던 사람에게 뿌려 죽이기도 했다.
폴 포트는 "풀을 죽이려면 뿌리도 죽여야 한다.", "썩은 사과는 상자째로 던져야 한다."는 말을 남기며 '반동분자'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고, 이 지침에 따라 크메르 루주는 체포된 사람의 3대에까지 연좌제를 적용해 처형자의 아내는 물론 그들의 어린 자녀들까지 사지를 찢어 죽였다.
거기다가 그들의 악행은 젖먹이 아기들에게도 예외가 없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젖먹이 아기들에게 가장 몹쓸 짓 중의 몹쓸 짓을 저질렀다. 크메르 루주는 아이들이 자라서 복수하는 것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어린 아이들을 젖먹이 아기들까지 가리지 않고 살해했으며 폴 포트는 크메르 루주로 하여금 만약 한 '반동분자'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가장 먼저 살해하고는 부모도 고문한 후 살해하게 했는데 살해한 방식도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아기들을 공중으로 던져 총검술 연습에 사용하거나 운다고 7~8개월밖에 안 된 아기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빼앗은 후 3층 발코니에서 떨어뜨리거나 아이들을 아예 악어가 득실거리는 늪에 던져 악어밥으로 주는 식으로 살해한 것을 넘어 아예 팔이나 다리를 잡고 몸뚱이를 바위나 시멘트 바닥 또는 통나무 등에 내려쳐 끔찍하게 살해한 것도 모자라 마을에 스피커를 달아서 온 마을 사람들이 이 아기가 고통에 몸부리치는 비명소리를 듣게 하거나 나무에 갓난아기를 내리치는 동안 스피커로 선전 가요를 요란하게 틀어서 아기의 비명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크메르 루주는 단순히 끔찍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 광경을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강제로 지켜보게 한 것도 모자라 그 아이의 시신을 근처에 미리 파둔 큰 구덩이에다 던져넣은 후 그 아이의 어머니를 강간하고는 때려 죽인 후 아기와 같은 구덩이에 암매장했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 군인들은 인육을 먹으면 극도로 무자비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얻게 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크메르 루주 치하 캄보디아에서는 엽기적인 식인 행위들도 일어났다. 크메르 루주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기도 하며 폴 포트 정권의 잔학상을 그린 아카데미상 수상 영화 '킬링필드'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행 응오르는 "크메르 루주는 물고기를 훔친 부이 소판(당시 31세)이라는 친척을 인민재판에 회부한 후 죽인 뒤 간을 꺼내 요리해 먹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어떤 크메르 루주 군인들은 구치소에 감금되었던 출산 직전의 임산부를 연행한 후 살해하고 간과 심장을 술안주로 삼기도 했으며 한 여성에게는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 잘라낸 간을 요리하도록 강요하기도 했고 심지어 한 여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후 그 여자의 10살밖에 안 된 자식을 살해하고 문자 그대로 그 아이의 간을 꺼내 먹은 일도 있었다. 농민 출신 크메르 루주 간부들은 '연기에 그을린 아이'를 마법의 부적으로 이용하고 죄수의 쓸개를 꺼내 약으로 먹었다. 크메르 루주 수뇌부는 이런 행위들을 잘 알았다. 손 센은 지방 관리들로부터 이런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받았다. 하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이들의 학살 방법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략해서 후술할 S-21 수용소를 탈환했을 때 수용소 곳곳에 고문으로 심하게 훼손된 시신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던 참혹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야만적인 방식으로 학살을 저지른 이유에 대해 사실은 원래 크메르 루주는 나치 독일의 절멸수용소처럼 가스실을 운영하여 '효율적으로' 학살을 벌이려고 했지만 치클론 B를 운영할 기술이 없어서 이런 방법들을 사용한 것이었다는 풍문이 전해진다.
그럼에도 이런 끔찍한 폭력, 고문, 살해들은 크메르 루주 정권 하에서 모두 혁명의 업적으로 포장되었다.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중 한 명은 대학살은 민중의 순화의 수단이라는 극단적인 망언을 남겼고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에 단 100만 명의 사람만 남더라도 우리는 학살을 계속해야 한다, 공산주의 혁명은 단 두 사람이 있어야 성공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하며 폴 포트 본인은 이런 피비린내 나는 학살들을 '캄보디아 혁명'이라고 부르고 이를 '세계 혁명의 본보기'라고 부른 것도 모자라 민주 캄푸치아는 혼란스러운 세계 한가운데 떠 있는 순결의 섬이자, 인류의 귀중한 본보기라고 불렀다.
뚜올쓸라엥
이러한 킬링 필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뚜올쓸라엥 이었다.
뚜올쓸라엥은 툴 스바이 크레이 고등학교(Toul Svay Prey High School)를 개조한 민주 캄푸치아의 정치범수용소로 4개의 3층 목조건물과 1개의 단층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제21 보안대 본부'를 의미하는 '21호 보안감옥(S-21, មន្ទីរស-២១)'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민주 캄푸치아의 건국 직후인 1975년 8월 15일 개장되었고 4년 동안 약 2만 명 이상이 수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9년 1월 7일에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함락시킨 후 해방시켰을 때 발견된 생존자가 겨우 12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가혹했던 곳으로 악명이 높다. 그야말로 킬링필드 시기의 수용소 중 가장 유명한 곳이자 캄보디아의 아우슈비츠라고 할 수 있는 셈.
S-21 감옥은 죄수들이 도착하면 이름을 확인하고 부여된 번호를 목에 걸고 사진을 찍은 뒤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일들에 대한 짧은 전기를 쓰게 한 후 보안 규정인 ‘규율 십계명’을 인지토록 했다. '규율 십계명'은 다음과 같다.
1. 질문을 하면 그에 맞는 대답을 하라, 질문을 회피하려고 애쓰지 말라.
2. 핑계를 만들거나 반항하지 말라.
3. 혁명에 위배되는 인간이 되는 바보 같은 자가 되지 말라.
4. 질문에 즉각적으로 대답하라. 시간을 끌지 말라.
5. 격식에 어긋나서 발생하는 사소한 사건에 대해서 불평하지 말라. 또 혁명의 본질에 대해 나에게 말하려고 하지 말라.
6. 몽둥이질이나 전기고문을 할 때 비명을 지르지 말라.
7. 항상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 명령을 기다려라. 명령이 없을 때는 가만히 있어라. 명령은 바로 행동으로 옮겨라.
8. 반역을 꾀한 후, 캄푸치아 끄럼(Kampuchea Krom)[6]을 핑계로 대지 말라.
9. 위의 모든 명령들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 구타당하고 전기 충격을 받을 각오를 하라. 얼마나 맞을지 셀 수 없을 것이다.
10. 규율에 복종하지 않을 때마다 그 벌로 채찍질 열 번, 전기 충격 다섯 번을 받을 것이다.
크메르 루주는 외딴 시골과 정글에서 살아와 글을 전혀 접하지 못한 데다 인격이 온전히 형성되지도 않았던 15세 전후의 청소년들에게 세뇌만 집중적으로 시키며 교도소에서 고문과 처형을 일삼는 살인기계로 만들었는데, 교도소의 교도관 중에는 숫자 '7' 이상을 세는 방법조차 모르던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뭔가를 물었을 때 1초도 생각하지 말고 즉각 대답해야 한다. 만약 생각한다면 그것은 반동이다."라는 말대로 맹목적인 복종밖에 할 수 없게 되어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전무했다. 실제로 뚜올 슬렝의 교도관들 중 무려 80%가 21세 미만에 일반적인 나이는 16~18세였으며 심지어 당시 수용소의 간수들 중에는 만으로 쳐도 초등학교 6학년 나이밖에 안 되는 겨우 12살밖에 안 된 아이들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에 이 수용소에서 심문을 받은 사람들은 '자술서'에 3명의 '동조자' 이름을 써야 했으며 이런 식으로 잡혀온 사람들은 다시 다른 3명을 끌어들여야 했고 이렇게 무려 2만 명 이상이 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비위생적인 수감 환경에 놓였다. 수감자들은 덥고 습한 열대 기후 속에서 샤워를 하는 것도 4일에 1번, 심한 경우에는 1개월에 한두번 정도밖에 하지 못했는데 한 방에 모인 죄수들에게 호스로 대충 물을 뿌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한 명씩 물을 뿌린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모아놓은 채로 물을 뿌리는 것이었다.
허락 없이 물을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회초리로 200번이나 맞은 '죄수'도 있었고 개나 의자, 벽, 테이블, 심지어는 전선과 채찍에게 경의를 표하게 하는 등의 정서적 가혹행위도 이루어졌고 수감자들 관의 대화 역시 금지되었다. 하루에 2번 식사가 주어지기는 했는데 그마저도 맹물만도 못한 조잡한 쌀죽 2~3 숟가락과 물 한 컵이 전부였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도 유별나다 싶었을 정도로 엽기적인 고문, 생체실험까지 벌어져 이곳에 수감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2~4개월 정도밖에 생존하지 못했으며 길어야 6~7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했다고 한다.
심문이 완료된 수감자들은 수감자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수용소 소장 깡 겍 이우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는데 실제로 겍 이우의 '권한'에 대해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발췌한 예시들을 들면 두치는 수감자 17명(10대 8명 + 어린이 9명)의 이름이 포함된 목록에 '그들을 산산조각 내라'는 명령을 적었으며 더 많은 수감자 명단이 포함된 목록에는 '부수기: 115명, 유지: 44명'이라고 적어 놨다. 그리고 이 목록과 심문 내용들은 두치가 엉까(Angkar)라고 불리던 크메르 루주 수뇌부에 보냈고 엉까는 이에 동의하며 수감자들의 운명을 확정지었다. 실제로 2009년 4월 7일에 두치는 자신이 뚜올 슬렝 수용소와 서부의 정글에 있던 캄퐁 스페우(Kampong Speu) 수용소에 있던 수감자들을 처형하라는 모든 명령이 자기로부터 온 것이라고 인정했으며 두치가 한 또 다른 증언에 따르면 본인이 수감자들의 '자백'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면 상관인 누온 찌어 부서기가 두치에게 조언하며 지시를 내렸다고 하고 폴 포트가 명령을 내리면 누온 찌어가 이 명령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겍 이우는 비록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 행위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어도 수감자들에 대한 심문과 고문 행위들을 감독했다.
고위 고문관 폰(Pon, Tang Sin Hean)은 부하들의 지나친 폭력을 꾸짖으면서도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피고인을 죽을 떄까지 두들겨패고, 피고인의 팔과 등, 성기를 찢어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폴 포트는 '풀을 죽이려면 뿌리도 죽여야 한다'는 말을 남기며 반동분자들의 씨를 말리고 자식들이 커서 복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동분자'들의 자식들까지 모조리 없애는 것을 공식 정책으로 삼게 했는데 이에 따라 뚜올 슬렝의 세뇌된 청소년 간수들은 잔악하게도 처형될 수감자들의 젖먹이 자식들까지 나무에 내리쳐 죽였고 다양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감추기 위해 '매직 트리(magic tree)' 또는 '킬링 트리(killing tree)'라는 나무에 매단 확성기로 크메르 루주의 선전가를 틀었다. 이러던 판이었으니 뚜올 슬렝의 악행들을 총괄하고 후에 재판에 회부될 때에도 극도의 뻔뻔함을 보였던 깡 겍 이우 소장마저 2008년 2월 26일에 수많은 죄 없는 아이들이 희생된 '킬링 트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이 나무에서 희생된 아이들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또 그렇게 죽어간 사망자들은 죽은 후에도 편안하지 못했는데 장례식은 고사하고 수용소 내 뜰에 무더기로 암매장당했으며 시신을 묻을 자리가 없자 프놈펜 남쪽에 있는 쯔응 아익(ជើងឯក)이라는 곳에 수용자를 옮겨 죽인 후 묻었다고 한다. 처음엔 여기에 시체를 묻기만 했으나 나중에는 그냥 살아있는 수감자들을 여기에 옮겨와서 가건물에 가뒀다가 차례가 되면 집단 학살하고 묻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쯔응 아익을 절멸수용소(extermination center)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크메르 루주의 몰락 직후 한 농부에 의해 쯔응 아익의 암매장된 시신들이 우연히 발견되었고 이후 베트남군이 이 곳을 발굴하여 총 8,895구의 인골이 나왔다. 현재까지 약 15,000명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산되는 총 129개의 무덤 중 80개가 발굴되었고 지금도 비가 와서 흙이 씻겨 내려가면 백골화된 시신이나 당시 희생자의 옷가지가 나올 정도라고 한다.
심지어 더 끔찍한 것은 뚜올쓸라엥은 전국에 있던 196곳의 수용소 중 한 곳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기록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지방의 수용소 중에는 이 뚜올쓸라엥이 양호해 보일 정도로 잔혹한 강제수용소/절멸수용소가 적지 않았다는 증언까지 있다. 숲에서 먹을거리를 찾다가 북서부 지방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행 S. 응고르가 이런 곳 중 한 곳에 대해 진술한 적이 있다. - ""숲속 깊이 끌려들어간 우리는 전에 본 적 없는 건물 앞에 멈춰섰다. 그 건물 처마에 우글쭈글한 검은색 물체 몇 개가 걸려있었지만, 너무 멀어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후에 교도관들이 임신한 여인을 끌고 왔다. 고문관이 여인의 옷을 찢더니 여인의 복부를 가르고 뱃속에서 태아를 꺼냈다. 고개를 돌렸지만, 여인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비명 소리가 잦아들어 흐느낌으로 바뀌었고, 한참 뒤 그 흐느낌은 자비로운 죽음의 침묵으로 바뀌었다. 살인마는 태아의 목을 쥐고 태연하게 내 옆을 지나갔다. 그러고는 태아를 동여매 처마에 걸었다. 처음에 보았던 우글쭈글한 검은색 물체는 다름 아닌 말라 오그라든 태아들이었다.""
상술한 것처럼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뚜올쓸라엥에 수감되었는데 이들 중 어린아이들이 무려 2천여 명에 달했다. 게다가 뚜올쓸라엥에는 캄보디아 국민 말고도 해상에서 나포된 호주 출신의 외국인들도 수용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죽었다. 79명의 외국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나 수용소에서 일한 전직 사진사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는 더 있었다고 한다. 2012년 8월 무명의 기부자가 캄보디아 문서 관리소에 기부한 S-21 감옥 수감자들의 사진 1,427장 중 서양인의 사진이 2장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한 장은 1978년에 싱가포르에서 하와이를 향해 배를 타고 가다가 캄보디아 해상으로 진입하는 바람에 나포되어 끌려왔던 미국인 크리스토퍼 에드워드 디랜스(Christopher Edward DeLance)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또 나머지 한 장은 프놈펜의 프랑스 대사관 직원으로 일했던 앙드레 가스통 쿠티뉴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외국인이 뚜올 슬렝에서 죽는 경우는 그 외에도 많았다. 요트를 타고 가다가 캄보디아 해안 근처로 떠내려와 붙잡힌 영국인들도 여기서 죽었고 어느 미국인 수감자는 고문 끝에 "12세부터 CIA에서 일했다"는 거짓 증언까지 하기도 했다. 뚜올 슬렝에서 죽은 서양인들은 폐타이어에 넣어진 채 소각되어 모든 흔적이 지워졌다.
그리고 이 수용소에는 정부 차원에서 조작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도 회부되었는데 1976년 9월 20일에는 '베트남의 사주를 받아 캄푸치아 노동당을 만들고 하노이와 손을 잡고 새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는 이유로 존재하지도 않는 당의 당원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S-21에 끌려갔으며 당연히 끌려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이 수용소의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보파나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원래 교사 집안에서 부유하게 자라나서 고등 교육을 받았고 같은 또래인 시타와 약혼까지 하는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고 론 놀 정부가 세워지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두 사람은 헤어졌고 심지어 보파나는 론 놀 수하의 군인에게 강간을 당해 원하지 않는 임신까지 했다. 이후 크메르 루주 정권이 세워지고 그녀는 집단 농장에서 강제 노동을 하다가 크메르 루주의 조직원인 시타와 재회했다. 겨우 만난 둘은 가명을 쓴 비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사랑을 키우는 조그만 행복을 키워갔다. 그러던 어느 날 보파나의 유산으로 이 두 사람의 관계가 발각되면서 시타는 바로 공개처형되었고 보파나는 S-21 수용소로 끌려가고 오랜 고문을 견디지 못해 CIA 요원이란 거짓 자백을 한 뒤 바로 처형되었다. 이후 이 둘의 사연과 편지는 당시 킬링필드를 연구하던 서양 역사학자에게 발견되어 S-21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심지어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 중에는 민주 캄푸치아의 최고 권력자였던 폴 포트의 남동생도 있었으며 뚜올 슬렝의 간수가 후에 다른 수용소에 수감되는 일도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그 이유는 죄수를 너무 일찍 죽이는 바람에(고문 중에 죽는 경우도 포함) '죄수들을 침묵시켜 죄를 자백하지 않게 하고 공모자들을 자유롭게 해 줬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임자들이 후임자들의 손에 고문을 당했고 후임자들은 그 뒤의 후임자들에게 고문을 당해 죽었다. 그리고 뚜올 슬렝 운영 초기에는 뚜올 슬렝에 몇 주마다 2~3대의 트럭을 보내 그 트럭에 수감자들을 태워 옮긴 후 처형하게 했는데 1978년에는 트럭이 매일 도착했다고 하며 크메르 루주 정권 말기에는 하루에 300명씩 죽어나갔고, 심지어 수용소의 기록에 따르면 1978년 5월 27일에는 정확히 582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는 24시간 동안 처형을 전혀 멈추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1시간마다 약 24명, 2.5분마다 1명씩 처형당한 꼴이다!
사실 이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 중 70%는 전직 크메르 루주 출신 인사들이었다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코이 툰이나 후 님처럼 크메르 루주의 지방 파벌간, 계파간 갈등 속에서 반역자로 몰려 수감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뚜올쓸라엥의 몇 안 되는 수용자 춤 메이는 "크메르는 내 가족을 내 인생을 모두 빼앗아갔다. 나는 매일 밤 울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들(크메르 루주)을 모두 용서했다. 이제는 그들에 대한 분노도 없다. 그저 측은할 뿐이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이들(뚜올쓸라엥에서 사망한 크메르 루주 인사들)의 이름이 비문을 새기는 것은 전적으로 반대한다. 그런 자들과 함께 희생자들의 이름이 올라가는 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내 아내와 아들, 그리고 희생된 모든 이들을 욕되게 만드는 일이다...!"라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 수용소의 생존자는 겨우 12명에 불과하다. 이들 중 5명은 1~8세 정도의 어린이들이었고 성인은 단 7명밖에 없었는데 이들도 모두 선전용 예술작품 제작이나 실용적 용도로 쓰기 위해 살려둔 것이었다.
- 첨 메이(Chum Mey, 1930~) - 수리공. 1978년 10월 28일에 뚜올 슬렝에 수감되었다. 가족들이 모두 살해당했지만 타자기나 재봉틀 같은 기계들을 수리할 수 있어서 크메르 루주가 살려놨다고 한다. 귀에 전기 충격을 받아 한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 루이 니 콩(Ruy Nea kong, 194?~1986) - 예술가. 뚜올 슬렝에서 생존한 성인 수감자 중 가장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자료가 별로 없다.
- 이엠 찬(Iem Chan, 1940~2000) - 조각가. 1978년 2월 18일에 뚜올 슬렝에 수감되었다. 폴 포트의 흉상을 만들기 위해 살려 뒀으며 뚜올 슬렝에서 풀려난 이후 문체부에서 조각을 가르치다가 이후 프놈펜에서 조각 교사로 일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
- 반 나트(Vann Nath, 1946~2011) - 화가. 1978년 1월 14일에 뚜올 슬렝에 수감되었다. 이 수용소의 생존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기도 한데 수감 당시에는 폴 포트의 반신상을 만들어야 했으며 크메르 루주의 몰락 직후인 1980년에 이 감옥을 추모 박물관으로 만드는 작업에도 협력했고 이후 킬링필드의 끔찍한 참상을 회고록과 그림으로 남겨 후대에 알렸다.
- 보우 멩(Bou Meng, 1941~) - 화가. 1977년 8월 16일에 뚜올 슬렝에 수감되었다. 폴 포트의 초상화와 선전용 그림들을 그리게 하기 위해 살려뒀으며 이 사람도 고문 후유증으로 한쪽 귀가 멀었고 아내는 뚜올 슬렝으로 끌려온 직후 살해되었고 아동 센터로 보내진 아이들은 모두 굶어 죽었다.
- 파 탄찬(Pha Thanchan, 1936~2001). 번역가 겸 타이피스트. 1976년에 뚜올 슬렝에 수감되었다. 베트남인들에 대한 심문에 사용하기 위해 살려뒀으며 7명의 생존자 중 오랜 기간 동안 가장 심한 고문을 받았는데도 생존했기 때문에 동료 생존자들이 놀라워했을 정도였다.
- 잉 피치(Ing Pich, 194?~1996) - 기계공. 1977년에 뚜올 슬렝에 수감되었다. 감옥의 전기 발전 장비를 관리하는 기술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며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고문을 해야 하는 참극을 겪었다. 공공사업교통부에서 여러 해 동안 일했다고 하며 이후 뚜올 슬렝이 박물관으로 변환된 후안 1980년 7월 13일부터 초대 관장을 역임했고, 1990년대 초까지 뚜올 슬렝 기념관의 이사를 역임했다.
참고로 폴 포트는 킬링필드의 참극 속에서도 '캄보디아 혁명'이 "세계 혁명의 본보기"이며 "민주 캄푸치아는 혼란스러운 세계 한가운데 떠 있는 순결의 섬이자, 인류의 귀중한 본보기"라고 했으며, 당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학술자료에 따르면 화폐 폐지와 시장 경제의 금지 등을 예로, "우리는 세계 다른 국가에서 한 번도 시행한 적 없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며,, 그 덕분에 인류가 수백 년 동안 씨름해온 도시와 지방 간의 모순이 성공적으로 해소되고 있다"는 말을 넘어 무려 전 세계가 (우리를) 부러워하고 칭찬하면서 우리를 따라 배우고 있다고까지 적혀 있었다. 물론 이 발언들은 킬링필드의 참상들을 보면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망언 중의 망언에 불과하다. 거기다가 '라디오 프놈펜'은 '민주 캄푸치아가 제국주의를 무너뜨린다면 미국인을 비롯한 온 인류가 승리를 맛볼 것이다'며 허황된 자만심을 표출했다.
몰락
무슨 깡인지 모르겠으나 미군이 버리고 간 물자들을 흡수하고 전투경험도 잔뜩 쌓은 베트남을 선제공격하여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가 되려 역관광 당하여 결국 1979년 1월 7일에 베트남군은 수도 프놈펜을 함락하면서 민주 캄푸치아 정권을 붕괴시켰고, 베트남군과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반크메르 루주 공산 세력들의 주도로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세워진다. 이때 정권을 잃고 쫓겨난 폴 포트와 키우 썸펀 등 크메르 루주 세력들은 밀림으로 들어가 캄보디아에 주둔한 베트남군과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정부군에 맞서 저항을 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한동안 폴 포트의 사망설까지 돌 정도였다.
한편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친베트남 정부를 수립하자 미국과 중국은 베트남의 캄보디아에 대한 영향력 투사를 막기 위해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이라며 정권을 잃고 반군 단체로 전락한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 이 때는 소련 견제와 헨리 키신저를 위시로 한 외교 정책에 의해 중국과 더 가까웠고 따라서 친중적인 캄보디아를 밀어준 것. 미국의 이같은 개입은 지금까지도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이때의 지원으로 인해서인지 크메르 루주 반군병이 M16 소총이나 56식 소총 같이 미국제 총기와 중국제 총기를 함께 사용하는 사진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조차 이를 비난할 자격도 없는 게 이들 스스로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베트남의 불법 괴뢰정부라 보며 집권시기 동안 잔혹한 학살과 탄압을 일삼던 크메르 루주를 캄보디아의 합법정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글로 도망친 폴 포트는 공식적으로 크메르 루주 총지도자에서 물러났으나 실세로서 계속 막후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결국 부하들과 충돌했다. 1989년에 베트남군의 철수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자 시아누크의 민족통일전선(FUNCINPEC), 손 산의 크메르인민민족해방전선(KPNLF)과 함께 새 정부 구성을 논의코자 했다. 그러나 폴 포트는 옛날부터 함께 해 온 동료들보다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따 목(Ta Mok, 1926–2006)총참모장을 의지했고 1990년대에는 따 목이 폴 포트를 대신해서 간부들을 회의에 소집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베트남과 베트남의 지원을 받던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정권이 폴 포트 정권이 자행한 킬링필드의 실상을 전 세계 각국에 홍보하면서 폴 포트와 그 세력에 대한 비난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이들을 지원해준 미국과 중국도 같이 비난을 받으면서 점차 손을 떼기 시작한다. 결국 국제적인 여론과 UN의 개입으로 1993년에 1970년 쿠데타로 축출되었던 시아누크 국왕을 다시 국왕으로 복위시키면서 무너졌던 캄보디아 왕국이 다시 재성립되었고 이에 불복한 폴 포트와 그의 측근들이 복귀한 캄보디아 왕실에 반기를 들며 내전을 벌였기에 폴 포트에 대한 비난은 더 커져 갔다.
이런 장기전 아래 폴 포트파의 내분은 더욱 심해졌고, 1995년 부하들의 배신으로 폴 포트는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한 중국 원조를 착복한 배신자로 규탄 받은 이엥 사리는 1996년 숙청에 겁을 먹어서 병사 4천명을 이끌고 캄보디아 왕국 정부군에게 투항했는데, 폴 포트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여담으로 폴 포트는 권력에서 쫓겨난 후 얼마 안 있어 본인의 집권 무렵부터 조현병과 망상장애에 시달려온 전처 키우 폰나리와 이혼하고는 1985년 여름에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며 자기보다 37세나 어린 23세의 탄약 운반자 미어 손(មា ស៊ុន, Mea son, 1962–)과 재혼하고 다음해 봄에 미어 싯(Mea Sith, 1986–)이라는 이름의 딸을 가졌는데, 폴 포트는 61세라는 비교적 고령에 자신이 처음으로 가진 자녀였던 미어 싯을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최후
그러던 중 1997년 6월 10일 밤에 폴 포트의 최측근이자 민주 캄푸치아의 국방부장인 손 센 일가가 참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손 센은 휴대전화로 캄보디아 정부의 훈 센과 은밀히 교섭을 했는데, 폴 포트가 이 사실을 알고 배신자라 하여 부하들에게 손 센 일가를 총살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를 받은 병사들은 같은 날에 손 센과 윤 얏, 다른 가족들 12명을 모두 총살했다. 손 센은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으며, 이 날 총살된 시신들은 픽업 트럭으로 깔아뭉개졌다.
따 목은 폴 포트가 그의 오른팔이었던 손 센을 살해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위험하다고 생각해 1997년 7월 25일 돌연 손 센 일가 살해죄로 폴 포트를 구속해 인민 재판에 회부하여 종신형을 선고했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폴 포트는 산 중턱에 있는 조잡한 헛간에 연금되었다. 당시 증언으로는 폴 포트의 후처와 경호원, 키우 삼판의 아내가 폴 포트의 시중을 들었지만 폴 포트는 이미 뇌졸중으로 왼쪽 몸이 마비되고, 심각한 심장 질환과 고혈압을 앓는 데다 암에 걸린 몸이었다고 한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 폴 포트는 부하들의 질책에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죽기 반년 전인 1997년 10월 16일에 미국인 기자 네이트 세이어(Nate Thayer, 1960–2023)와 한 인터뷰에서조차 그는 "나는 투쟁을 수행했을 뿐 사람을 살해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라, 내가 야만인으로 보이는가. 내 양심은 깨끗하다.", "75~78년의 통치기간 중 우리의 운동이 실수를 저지르긴 했어도 이는 베트남 침공으로부터 캄보디아와 국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었으며 나는 투쟁을 수행한 것이다."라며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죄를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했다.
게다가 폴 포트는 그밖에 정적에 대한 학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주장했고, '오랜 적인 베트남의 지배에서 캄보디아를 구했다'는 말도 남겼다. 그리고 폴 포트에게 악명 높았던 '뚜올 슬렝'을 물어 보자 그 고문소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인했고, 아사 등을 포함한 대량학살은 모두 베트남과 친베트남 정부 측이 주도했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다만 폴 포트의 축출을 야기했던 손 센 가족 살해 사건에 대해 폴 포트는 자신이 처형을 명령했다고 시인했으나 "손 센과 그 가족만의 처단을 명령했을 뿐 어린애들까지 죽이라고 하진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1998년 3월 케 팍과 픽 체앙 등이 크메르 루주 잔당에서 이탈하였다. 동년 4월에는 빌 클린턴 행정부가 폴 포트를 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해 재판을 받게 할 방침을 밝혔고, 캄보디아 정부군의 공격이 심해지는 가운데 간부 중에는 폴 포트를 미국에 인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당시 폴 포트는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 상태였는데, 크메르 루주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는 중이었던 탓에 태국으로 도망칠 준비를 했던 때문이라고도 하나, 따 목이 폴 포트를 태국 난민캠프를 경유해서 미국에 넘길 요량으로 위장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폴 포트는 대단히 쇠약해져 있었지만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폴 포트는 1998년 4월 16일에 구금장소로 이동할 것이 예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예정 날짜로부터 하루 전인 1998년 4월 15일에 폴 포트는 잠을 자는 중에 심부전으로 급사해버렸다. 어쩌면 잔혹하게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빠져 죽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망 당시 정황이 석연치 않아 온갖 반인륜적 범죄의 책임을 전부 폴 포트에게 떠넘기려던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에 의해 살해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인터뷰를 하러 찾아갔다가 그가 죽은 직후 부인과 대화한 세이어는 폴 포트 본인의 부탁으로 부인이 발륨과 클로로퀸 혼합물에 의한 음독 자살을 도와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시신은 얼음과 포름알데히드로 보존돼 기자들이 장례식을 보러 올 수 있도록 했다. 태국 법의학 전문가들은 지문과 치과 사진, 머리카락 샘플 등을 채취했다. 한 미국 특파원이 신원 확인을 위해 치아 하나를 제거하기를 원했다. 많은 크메르 루주 간부들은 폴 포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옛 지도자와 연루될까 두려워 모른체 했는데, 옛 부하들은 외딴 시골에 폴 포트의 시체를 들고 가 폴 포트의 가족들과 옛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찌어가 보는 앞에서 폴 포트의 장례식을 불교풍으로 치렀다. 이때 폴 포트의 부하들도 폴 포트를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하게 되었는지 이들은 옛 상관의 시신을 동네에 굴러다니던 폐타이어와 쓰레기와 함께 화장해 버렸다. 이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은 장례식이 놀랄 정도로 불결했다며 놀랐는데, 실제로 폴 포트를 가택연금시킨 따 목은 캄보디아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폴은 이제 끝났다. 권력도 없고, 자격도 없는 소의 배설물에 불과하다. 아니, 폴은 소의 배설물만도 못하다. 적어도 소의 배설물은 거름으로는 쓸 수 있으니."
따 목은 크메르 루주의 집권 전부터 민간인 학살을 명령, 자행하며 도합 10만 명 이상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며, 직접적으로 살상 행위에 가담하여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는데 그렇게 잔혹한 사람마저도 이런 말을 남겼을 정도니 폴 포트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인망을 잃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다만 따 목은 상술한 네이트 테이어와의 인터뷰를 할 시점에는 어느 정도 심정이 바뀌었는지 "폴 포트가 인류에 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미국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수십만 명이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다."라며 어느 정도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장례식에 참여한 폴 포트의 후처와 딸은 폴 포트에 대해 '세상이 뭐라고 말하든, 우리에게 있어서 그는 상냥한 남편이며, 아버지였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폴 포트의 묘지는 매장 한참 후에야 세워지게 되었고 원래는 건물도 세워져 있었다지만 누군가가 파괴했다고 전해진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폴 포트가 죽자 그의 만행을 직접 겪은 캄보디아 내부 여론은 그야말로 "천수 누리게 해준 것만으로도 화딱지 난다." 수준으로 험악했으며 그 어느 누구도 추모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심지어 킬링필드를 경험한 캄보디아인들은 지금까지도 폴 포트의 무덤에다가 오줌을 싸거나 침을 뱉는 등 모욕적인 처우를 하고 있으며 폴 포트의 폴 자만 나와도 '역적', '조국을 파괴한 쓰레기'라는 욕을 퍼붓는다고 한다.
폴 포트의 사망 이후 크메르 루주 시대는 막을 내렸다. 크메르 루주 라디오 방송은 중단되었고 직원들은 태국 난민 캠프로 피신했다. 키우 삼판 등을 비롯한 크메루 루주들은 내전에서 패배하고 1998년 12월 누온 찌어와 키우 삼판은 투항했으며, 1999년 3월 따 목 총참모장이 생포되면서 결국 모든 크메르 루주의 지도부 세력들은 체포되었고, 2007년부터 이엥 사리, 누온 체아, 키우 삼판, 이엥 티릿, 깡 겍 이우가 캄보디아법원특별법정(ECCC)에 회부되었으며, 재판 중에 사망한 이엥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3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고, 이후 누온 찌어와 깡 겍 이우가 각각 2019년/2020년에 옥사하면서 당시의 크메르 루주 최고위층은 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 한 명만이 아직 살아있는 셈이다.
한편, 폴 포트의 미망인은 1998년 5월 폴 포트의 비서였던 텝 쿤날(Tep Khunnal)과 함께 말레이시아로 간 후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폴 포트의 딸은 사 파차타(Sar Patchata)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말레이시아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딴 후 2014년에 시 비체카(Sy Vicheka)라는 크메르인 남성과 결혼한 후 캄보디아 북서부의 반띠 메안체이(Banteay Meanchey) 지방에서 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파차타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아버지를 위해 자주 기도하고 '다음 생이 있다면 다음 생에 아버지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 다만 그녀는 아버지가 퇴진한 후에 태어나 아버지의 악행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은 감안해야만 할 것이다.
평가
폴 포트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이자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물론 근현대사에서 잔혹한 독재자는 폴 포트를 제외하고도 무수히 많았는데, 히틀러와 스탈린은 물론이고 김씨 3대, 마오쩌둥, 마시아스 응게마, 이디 아민 정도가 폴 포트와 함께 동렬로 취급받는 극악한 독재자들이지만 이들마저 폴 포트에 비해서는 그나마 잔혹성의 수위가 낮거나 참작 여지가 존재한다. 특히나 폴 포트가 집권한 1970년대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집권한 시기로 꼽히는데, 폴 포트는 그들 중에서도 늘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으며 이전 세대의 독재자이자 인류 역대 최악의 독재자인 히틀러, 스탈린과 비견되니, 그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독재자였는지는 설명이 더 필요없는 셈이다. 선술한 인물들 전원이 인권을 억압하며 온갖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을 벌이거나 국가 경제를 후퇴시키는 등의 악행들을 저질러 저들이 세상을 떠난 지 한참 지난 현재까지도 널리 회자되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들로 간주되기는 하나, 그것을 넘어서 진영, 시대 불문 홀로코스트, 르완다 학살과 함께 인류의 존엄성의 근간을 뒤흔든, 근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잔혹하고 야만적인 학살 중 하나인 킬링필드를 일으키고, 문화대혁명보다 심하게 나라 자체를 본인만의 잘못된 사상으로 고의적으로 초토화시켰다는 점에서 폴 포트는 이들 중에서도 특히 최악의 독재자로 거론되기에 절대 부족하지 않다.
당장 현대사에서 대표적인 금지어가 된 히틀러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전 세계를 6년간 전쟁 속으로 밀어넣어 1700만 명이 넘는 인명을 학살했지만, 적어도 그가 죽이려고 한 대상은 지식인이 아니었고, 나치는 오히려 아리아인으로 분류되는 독일인들의 가치를 인류의 상징이자 미래로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독일인들을 강제수용소에 보내 굉장히 비인간적인 대우를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 홀로코스트의 수준도 폴 포트의 킬링필드 앞에서는 명함을 못내밀 정도였다. 물론 히틀러와 나치도 유대인, 슬라브인, 집시, 동성애자 등에 대해서 총살과 가스를 사용하여 대규모 학살을 저질렀는데, 나치의 학살은 효율성을 계산한 기계적 수법을 사용했다는 점이 충격적이라면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의 학살은 최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고안한 원시적 수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또한 학살도 학살이었지만 전국민을 고향에서 강제 이주시켜 한 명도 빠짐없이 집단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게 한 것과 사상 주입을 쉽게 하기 위해 가족이란 '구체제'를 없애고 부모와 자식은 서로 같이 있으면 안된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모든 캄보디아 사람들을 전부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고 자유의사 전혀 없이 국가의 강요로 강제결혼을 강행하며 사실상 '가족'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파괴하는 등 여느 폭군, 독재자들은 물론 상술된 독재자들도 상상도 못했을 정책을 시행했으니, 당연히 인류사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되는 것이다.
물론 폴 포트의 집권 전후로 캄보디아에서는 미국의 폭격, 론 놀의 실정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캄보디아 내전, 베트남의 침공과 이로 인한 혼란상 등으로 죽은 사람도 수없이 많지만,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는 그걸 떠나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로 불리는 대참사이자 비극으로 꼽혀오고 있으며, 캄보디아의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일말의 옹호나 참작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잔혹한 학살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나 폴 포트가 비판받는 원인 중 하나는 잔혹한 학살과 더불어, 잘못된 신념으로 나라를 고의적으로 붕괴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잔재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교육, 문화, 경제, 외교 등 모든 사회, 인재 인프라의 씨를 박살내다 못해 뿌리까지 뽑아 버리며 캄보디아를 극단적으로 후퇴시켰다. 결국 폴 포트의 만행은 집권 기간 내 국민은 물론 남은 국민의 미래까지 짓밟아 버려 크메르 루주 몰락 후 44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흐른 2023년까지 1인당 GDP가 2000달러를 밑돌았던 최빈국으로 만들었다.
얼마나 폴 포트의 만행이 잔혹했는지 크메르 루주 정권을 붕괴시킨 베트남은 물론이고 내전을 통해 공산당 정권이 성립된 캄보디아의 다른 이웃나라인 라오스와 한때 폴 포트 정권을 지지했던 중국, 북한 같은 같은 제2세계권 국가들조차도 크메르 루주의 실상을 보고는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원을 끊거나 혹은 피에 굶주린 살인마 취급하며 경악을 금치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제1세계는 물론이고 제2세계와 제3세계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성향 인사들은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를 옹호하지 않는 경우가 다수다. 또 '폴 포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넘어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과 공산주의 국가를 침공했다는 점을 내세워 '폴 포트는 사실 반공주의자다'라고까지 주장하며 폴 포트가 공산주의자를 자처했고, 제2세계권 진영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려는 사람도 일부 존재한다. 폴 포트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반응 다시 말해, 다른 공산주의 독재자들의 악행들은 어떻게든 목적은 좋았거나 서방권이 과장한 거라고 주장할 근거가 조금이나마 있지만, 애초에 폴 포트의 악행들은 진영논리만으로 두둔하거나 정당화하기에는 잔혹성과 피해 모두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고, 애초에 주체사상과도 같은 자신만의 극단주의적 사이비 이론으로 대학살극을 펼치고 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갔으니, 당연히 폴 포트의 변호를 아예 포기하거나 그 악행을 비판하게 된 것이다. 반미 성향 인사들도 미국을 비판할 때 근거로 드는 것 중 하나가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는 것이며, 폴 포트의 학살이 미국의 반공 전략에 따라 과장되었다고 두둔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킬링필드 과장설을 주장하며 킬링필드 희생자로 알려진 유골들은 대다수가 미국의 폭격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을 대충 묻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여론도 있으나 당연히 그런 여론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사회주의적 관점으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극단적이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입장에서 보아도 사유재산 불인정 과 전체적이고 폭압적인 가족주의, 우생학과 같은 극우적인 정책과 강령들을 내세워 자신만의 극우 혼합주의적인 사이비 사상을 만들고, 그 사이비 사상에 따라 인민들을 학살했으며 베트남에 의해 축출되자 오히려 서방, 특히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폴 포트는 미국과 손을 잡는 기회주의적 모습과 호화로운 생활, 덩샤오핑의 수정주의를 옹호했던 등의 이유로 아비마엘 구스만을 추종하는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비판의 대상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확히는 몇몇 극단적인 캄보디아 민족주의자들은 폴 포트의 베트남인 학살은 잘 한 일이었으며 폴 포트는 베트남의 침략으로부터 캄보디아를 방어하려 했던 국가적 영웅이라고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