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사원 집단 자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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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 등의 잔인한 묘사가 들어간 사진은 없으나 열람에 주의를 요합니다.

개요

1978년 11월 18일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요릭 타운에서 벌어진 미국의 사이비 교주 짐 존스가 창시한 기독교계 사이비 종교 '구주의 사도 인민사원'(Peoples Temple of the Disciples of Christ, 이하 인민사원)의 집단 자살 사건으로, 미국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 역사상 최대의 집단 자살 사건이다.

사건 정황

제임스 워런 존스1931년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났다. 편모 슬하에서 자란 존스는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학생 시절부터 리치먼드의 위험한 슬럼가에서 기독교 전도를 하는 등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이후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심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짐 존스는 본래는 평등주의, 사회주의와 초기 개신교의 박애주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오히려 열려 있고 박식한 사람이었는데 실제로 인디애나폴리스시의 감리교회에서 근무하면서 백인과 흑인의 구분이 없는 통합 예배를 주장하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이후 이것이 발단이 되어 1955년에 자신의 교단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목회 활동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윌리엄 브랜험의 늦은비 운동 등 오순절교회에서 파생된 이단의 영향도 받았으며 'Full Gospel'이란 명칭도 당시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존스는 처음에는 개신교적 믿음을 강조하며 인종 통합과 인종 차별 반대, 사회 정의, 평등, 자유, 빈민 구제 등 바람직한 가치를 표방했다. 존스 자신의 카리스마도 굉장했으며 올곧은 모습에 곧 많은 사람들이 존스를 따랐다. 특히 공동체 통합을 표방하면서 교회를 통하여 사회를 통합하자고 주장한 것은 (남미에서 해방 신학이 인기를 끌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경제적, 인종적 차별로 핍박받은 사람들에게 크게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영향력 때문에 개방적 개신교 교단인 '그리스도의 제자회'가 존스에게 목사 안수를 주고 자신들의 교파로 포함시켰다. 이렇게 초기에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내보일지언정 종교적 틀을 벗어나지는 않았고 종교의 틀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평등 등을 왜곡해서 알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 당시 미국 정치계가 급속한 변화에 휩싸이면서 종전의 사회적 질서가 붕괴하고 문화적 충돌과 사상적 양극단화가 가속된 끝에 과격주의가 빠르게 번지기 시작하였으니 이러한 시대적 움직임에 민감한 영향을 받은 존스도 차츰차츰 변질되었다. 특히 인종 통합을 주장하다가 교회에서 내쫓겼던 기억은 1960년대의 사회적 히스테리와 맞물리면서 자신이 가꾸어온 교단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의 반대파들이 공작 중이라는 피해의식으로 발전하였다.

1964년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존스는 곧바로 교회를 캘리포니아로 이주시켰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지금도 그렇지만 미국의 사회적 변혁에 있어 최전선이었고 다양한 이념과 급진적 운동이 활동하고 충돌하던 곳이었다.

존스는 여기에서 공산주의 사상과 초기 기독교 신도의 사상을 따라 신도의 소득, 부동산, 보험금 등의 자산을 사원에 바쳐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나눠 가지도록 했다. 집회에서는 인터내셔널가를 찬송가로 부르고 설교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까기도 했을 정도로 반기독교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으며 특히 마오쩌둥 사상에 심취하여 안티 파시즘 정당인 흑표당의 지도자였던 휴이 뉴턴이나 안젤라 데이비스 등과 협력하여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신도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사회에서도 이 요상한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하자 존스의 피해망상이 자극받아 기어이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

1974년 인민사원은 남아메리카 가이아나의 토지를 구입했고 아예 미국을 떠나 그곳에 마을을 꾸리고 정착했는데 이 마을이 바로 '존스타운'으로 자신만의 왕국에서 짐 존스는 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존스는 미국 사회와 기독교를 공공연하게 '자본주의, 제국주의'라고 비난하고 신도를 선동하면서 스스로를 신격화했다.

배리 캐넌 전 미국 대사와 정부 인사가 한 증언에 따르면, 가이아나 정부에서 주권 침해 가능성이 높은 존스타운의 미국인 정착촌을 오랫동안 묵인해 줬던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가이아나는 베네수엘라 정부와 오랫동안 영토 분쟁을 빚고 있었으며, 베네수엘라 국경 근처의 미국인 정착촌이 만들어지게 되면 베네수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한 일종의 인계철선이 되는 완충 지대로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는 가이아나가 건국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영토 분쟁이다. 현재 가이아나의 서부 영토인 '과야나 에세키바'는 베네수엘라가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개척 구역'이라고 주장하는데, 가이아나가 영국 식민지였던 시절에 영국이 베네수엘라로부터 뺏어 간 땅이기 때문에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면서 억울하게 영토를 빼앗겼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고 차베스 집권기부터 베네수엘라 국기의 별이 7개에서 8개로 늘어난 것도, 빼앗긴 가이아나 서부의 영토를 반영한 것이다.

결국 가이아나 정부의 묵인 아래 성공적으로 정착한 짐 존스는 신도들의 무단 탈출을 막기 위해서 마을 밖으로 나가면 독사와 원주민 때문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하면서 무장 경비병을 마을 근처에 세워놓고 엄중하게 감시를 시키기까지 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농작물이나 다른 작업에 대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조금이라도 불만을 품으면 가차 없이 구타와 정신적 학대를 했다고 한다. 신도들, 심지어 가족들끼리도 서로 감시하면서 존스타운에 대한 적대적인 자세가 보이면 지체 없이 짐 존스와 간부들에게 보고했다. 생존자인 레슬리 윌슨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자신은 감시 체제로 인해 당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부모와 형제에게도 밝힐 수 없었다"라고 증언했다.

결국 존스타운에 갇힌 신도의 안전을 염려한 미국 본토에 있었던 가족의 항의로 네브래스카 출신 레오 라이언 하원 의원이 진상 조사를 위해 가이아나로 떠났다. 하지만 이 방문은 존스타운의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는커녕 끔찍한 결말을 부르고 말았다.

레오 일행이 타고 온 비행기


가이아나 시간으로 1978년 11월 17일 아침에 레오 라이언 의원과 조사단·기자단은 비행기를 타고 존스타운을 방문했다. 당시 짐 존스는 조사단을 속이기 위해 신도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처럼 꾸미고 거짓 증언을 하도록 강요했으며 처음에는 라이언 의원도 신도들이 행복해 보인다며 속아 넘어갔다.

그런데 버논 고즈니(Vernon Gosney, 1953~2021, 당시 25세)라는 남자 신도가 존스타운의 실상을 적은 쪽지를 짐 존스와 그의 하수인들의 시선을 피해 조사단원인 NBC 기자 돈 해리스(Don Harris, 1936~1978, 당시 42세)에게 전달하면서 라이언 의원과 조사단도 실상을 알게 되었다. 18일 아침 조사단이 조사를 하러 온 가운데 신도 메리 스미스(Mery Smith, 1940~?, 당시 38세)라는 여자가 '존스타운에서 빠져나가게 해 달라'고 말했다. 이후 조사단원 NBC 기자 돈 해리스가 신도들을 인터뷰했는데 대부분의 신도들은 존스타운에 대해 행복하다, 살기 좋다는 말만 했지만 표정을 보면 존스의 보복이 있을까 봐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후 패트리샤 파크스(Patricia Parks, 1934~1978, 당시 44세)라는 신도가 라이언 의원의 법률 고문이었던 재키 스파이어(Jackie Speier, 1950~, 당시 28세)에게 가족과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했고 크리스 오닐(Chris Oneal, 1958~2014, 당시 20세)이라는 남자와 에디스 보그(Edith Bogg, 1939~, 당시 39세)라는 여자도 가족과 여기서 나가겠다고 하면서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밝힌 사람이 늘어났다. 이에 인민사원 내부는 발칵 뒤집혔고 교주인 존스와 간부들은 당혹스러워했다. 결국 귀국 의사를 밝힌 신도 15명과 면담하고 미국으로 보내 주기로 결정하여 15명이 조사단을 따라 존스타운을 빠져나갈 예정이었다.

사원 내부의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던 돈 해리스가 급히 짐 존스에게 실상이 적힌 쪽지를 보여주면서 묻자 심각한 표정이던 존스가 쪽지에 적힌 글은 거짓말이라며 제발 여기에서 당장 나가 달라는 말을 하였다. 라이언 의원이 존스에게 가서 신도들이 떠나려고 한다며 단도직입적으로 인민사원의 문제점을 말하려고 하던 그때 돈 슬라이(Don Sly, 1936~1978, 당시 42세)라는 신도가 뒤에서 라이언의 목을 잡고 로 찌르려고 했다. 다행히 라이언의 변호사 2명이 흉기를 빼앗아 저지하여 라이언 의원은 자상을 입기는 했지만 크게 다치진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11월 18일 존스는 조사를 마치고 돌아가려 하는 조사단과 신도들을 살해하려고 이륙장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보냈다. 탈출하는 사람 속에 몰래 총을 든 첩자 한 명을 숨겼는데 이 첩자는 래리 레이턴(Larry Layton, 1946~, 당시 32세)이라는 신도였다. 레이턴은 이륙하는 중에 총을 꺼내 다른 신도들에게 총을 쏘아 살해하려 했고 레오 라이언 의원의 직원 재키 스파이어가 총상을 입으면서까지 막았으나 결국 비행기 밖에서 라이언 의원과 NBC 기자 돈 해리스, 신도 패트리샤 파크스, 카메라맨 밥 브라운(Bob Brown, ?~1978), 사진기사 그레그 로빈슨(Greg Robinson, 1951~1978, 당시 27세) 등 5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중상을 입은 다른 사람들은 정글의 수로로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래리 레이턴은 정글로 숨었다가 가이아나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된 후 2002년에 출소하였다.

당시 집단 자살에 사용된 청산가리


오후 5시 30분 비행장에서 습격 직후 짐 존스 자신을 포함하여 신도 총 909명이 청산가리를 탄 쿨에이드를 마시고 집단 자살을 했는데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순순히 존스의 말에 따라 자신의 자식들에게 독을 먹인 다음 자기들도 마시고 사망했다.

한편 짐 존스는 자신의 일련의 과정을 녹음한 뒤 최종적으로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되었는데 존스가 자살했는지 아니면 함께 숨진 채 발견된 교단 간부에 의해 살해됐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부검을 통해 짐 존스 본인도 일단은 음독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지타운 인민사원 지부에서도 신도 4명이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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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으로 918명이 사망했으며 사건 직후 가이아나군이 출동하여 시신을 모두 수습하였다. 존스타운은 1980년 라오스에서 망명한 몽족 난민들을 위한 임시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에 화재로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글에 의해 매립되어 현재는 몇몇 잔해를 제외하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사건 이후 존스타운 부지에는 위령비가 하나 세워져 있을 뿐이다.

당시 이 사건은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오늘날까지도 미국인의 머릿속에 사이비 종교의 대표적인 예로 자리 잡고 있다. 사건의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상충하는 견해를 담은 책과 기사가 지금까지도 발표되고 있으며 종교학, 심리학, 철학, 범죄학 등 각종 학문에서도 이 사건을 메인 테마로 다룬 적이 있다. 공산주의와 크게 연계되었기 때문에 종교, 정치적으로도 주요한 화제가 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언론에 의해 집중 보도 되었으며 한국에서도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생존자들

이 와중에도 다행히 생존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사건 당일 이륙장을 통해 신도 15명이 귀국하려고 하기 전 신도 11명이 존스와 간부들이 라이언 의원과 조사단에게 신경을 쓴 틈을 타 몰래 정글로 도망친 후 탈출해서 살아남았다. 탈출을 주도한 레슬리 윌슨(Leslie Willson, 1957~, 당시 21세)이라는 여자는 사건 당일 충성파 신도였던 남편에게 피크닉을 할 것이라며 속이고 자신의 아들 재커리(Zachary Willson, 1976~, 당시 2세)와 함께 탈출하려고 했다. 이때 마음이 맞은 산드라 에반스(Sandra Evans, 1948~, 당시 30세), 리처드 클라크(Richard Clark, 1936~2001, 당시 41세), 다이앤 루이(Diane Rouie, 1952~, 당시 26세)와 함께 경비들을 피해 정글로 도망친 후 탈출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 함께 탈출한 사람들은 에반스의 남편 줄리어스(Julius Evans, 1948~2004, 당시 30세)와 딸 소니아(Sonya Evans, 1967~, 당시 11세), 샬라(Sharla Evans, 1971~, 당시 7세), 이웃 로버트 폴(Robert Paul, 1945~2010, 당시 33세)과 조니 프랭클린(Jonney Franklin, 1945~, 당시 33세) 등이었다. 하지만 집단 대학살로 인해 윌슨은 자신의 남편과 부모, 형제, 조카를 잃고 말았다.

여기에 존스타운에서 일하던 남성 변호사 마이클 사이먼(Michael Simon, 1945~, 당시 33세)과 여성 변호사 조이스 베이크스(Joyce Bakes, 1946~, 당시 32세)는 사건 직전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하여 존스에게 허락을 받고 존스타운을 빠져나왔고 무장 경비가 뒤쫓았지만 이들은 정글에 숨었다가 조지타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존스는 사건 직전에 존스타운에서 보유하고 있었던 현금을 가방 2개에 나눠 담고 조지타운에 있었던 소련 대사관으로 가져다주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이를 수행한 남자 3명은 살아남았다.

또 귀가 안 들려서 모이라는 소리를 못 들었다가 나중에 수로에 몸을 숨겨서 살아남은 남자 1명, 모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침대 밑에 숨은 여자, 모였다가 경비를 속이고 탈출한 남자 1명, 모였다가 청진기를 가져오겠다고 하고는 숨은 남자 1명 등 4명이 더 살아남았다.

그리고 산드라 에반스의 삼녀 시렐리 에반스(Shirelle Evans, 1973~, 당시 5세)가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숲속에 숨어 있었다가 가이아나 정부 쪽 사람들에게 구조되었다. 이 아이는 나중에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간 후 한 가정에 입양되었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또 사건 직전에 조지타운에 위치한 인민사원 지부로 존스타운 거주자들 몇십 명이 이동했고 비슷한 시기에 존스타운 근무자 일부가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인민사원 지부로 이동하는 일이 있었다. 이 덕에 이 사람들은 참극을 피할 수 있었지만 사건 당일에 존스타운에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존자 집계에서 제외되는 일이 많다고 한다.

한편 짐 존스의 아들 짐 존스 주니어는 당시 가이아나 대표 팀과의 농구 경기 때문에 조지타운으로 출장을 가서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고[21] 다른 아들인 스티븐 존스도 조지타운에 있어서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다. 이 아들 2명은 조사단이 존스타운에 들어올 때쯤에 존스로부터 돌아오라는 명령을 들었으나 뭔가 수상쩍어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존스의 다른 자식들과 존스의 아내는 이 사건으로 짐 존스와 존스타운에 남은 다른 신도들과 함께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자살인가, 타살인가?

이 사건은 자살 사건이라고 불리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는데 인민사원 신도였던 스탠리 클레이턴(Stanley Clayton, 1953~, 당시 25세), 오델 로즈(Odell Rose, 1942~2014, 당시 36세) 두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존스는 신도들을 모아 놓고 강제로 자살할 것을 명령했다고 하며 이 사건과 관련해서 세간에 퍼져 있는 '신도들이 나란히 줄을 서서 독극물을 받아먹고 아무 저항 없이 죽어갔다'는 인식도 사실과 다르다고 증언했다. 당시 신도들 주위에는 무장 경비원들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저항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을 것이다. 로즈는 어린이에게 강제로 독극물을 먹이는 모습도 실제로 가까이에서 목격했다고 밝혔다.

로즈를 포함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깜깜한 새벽에 사이렌을 울리며 존스가 백야(White night)라고 방송하며 신도를 모이게 하고 외부 세력이 인민사원의 신도와 존스 자신을 위협하려고 한다는 가정하에 자신을 따르는지를 확인하려고 자살 연습을 한 적이 수차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신도들이 강요로 인해 독극물을 마신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자살한 것인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히 존스타운 주민 중 3분의 1이 16살 이하의 어린이였다. 어린이가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존스는 제일 먼저 부모더러 자식에게 독극물을 먹이라고 명령했다. 뒷걸음질치는 어린이를 붙잡은 인민사원 임원이 물딱총으로 독극물을 먹였고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고통에 울부짖는 와중에 집단 자살을 합리화하는 연설을 해 대면서 서로 박수를 쳤다. 이 과정이 하나도 남김없이 녹음 테이프로 남아 있으며 후일 FBI가 이를 발견하여 Q042라는 코드네임을 붙였다.

다만 모두가 짐 존스의 이런 미친 결정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틴 밀러(Christine Millor, 1918~1978, 당시 60세)라는 여자는 "러시아로 가자.", "아이들은 살려주자.", "생명권은 각자 자신에게 있으니 자살 또한 각자에 맡겨야 한다."는 상식적인 반론을 제기하였는데 짐 존스는 "이 파시스트 세상에 아이들을 남겨 고통받게 할 수는 없다.", "당신은 지금 죽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비관론으로 밀러의 말문을 막아 버렸고 다른 충성파 신도들은 밀러를 겁쟁이라며 비판해서 묵살시켰다. 밀러의 시신에서는 주사 자국이 발견되었기에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밀러의 자식들도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밀러의 마지막 주장은 서술한 Q042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짐 존스는 자신이 살해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며 라이언 의원 살인 사건은 자신들을 음모의 희생양으로 모는 것이라고 우겼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총을 든 경비병이 강요하는 분위기를 만든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또 많은 신도들이 순순히 독극물을 받아 마신 것도 허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실제로 자살한 사람들이 남긴 유언이나 메모에서 이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존스에 대한 믿음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사건 이후

시신은 모두 고국인 미국으로 이송되었으며 인수할 유가족이 없는 이들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에버그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2010년까지는 추모비만 달랑 있는 무덤이었으나 이후 희생자 전원의 이름이 적혔다.

다만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2008년 지노나 노우드(Jynona Norwood)가 주도한 모금 프로젝트로 '(존스를 제외한) 성인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기념석 2개가 제작되었는데 그 기념석의 크기가 6피트에 달할뿐더러 무겁기도 해서 희생자의 무덤에 세우면 필연적으로 유골이 훼손되기 때문에 매장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건립했다. 그런데 2010년 짐 존스의 양아들 등이 주도하여 '존스를 포함한 희생자 전원의 이름을 새긴 새로운 기념비'를 제작하여 희생자의 집단 묘 위에 세웠다.

신도들의 총격으로 사망한 레오 라이언 하원 의원은 1983년에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받았다.

노우드는 존스의 이름을 같이 새긴 것을 희생자를 모욕하는 짓으로 여겨 에버그린을 고소하고 문제의 기념비를 철거하며 자신들의 기념비를 그 자리에 세우게 해 달라고 청구하였다. 그러나 앨러미다 지방 법원과 샌프란시스코 항소 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단체는 둘로 쪼개져 버렸다. 노우드를 지지하는 쪽은 Jones-Town(사이트)를, 그렇지 않은 쪽은 Jones-Town-Memorial(사이트)를 운영한다. 참고로 존스는 에버그린에 묻히지 않고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한편 희생자 중 9구가 유가족이 아닌 이에게 넘어갔다가 2014년 델라웨어에서 뜬금없이 발견되는 일도 있었다. 에버그린에 따르면 희생자의 가족이나 생존자 중에도 여기에 묻힌 사람이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받을 것이라고 한다. 다만 더 이상 시신 안장을 할 자리는 없기 때문에 정 오고 싶으면 화장해야 한다고 한다.

라이언 의원의 법률 고문으로 조사단에 동참했던 재키 스파이어는 총상을 입었으나 겨우 살아남았으며 이후 정계에 입문하여 캘리포니아주 하원, 상원 의원을 거쳐 2008년에는 라이언의 옛 지역구에서 연방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는데 쭉 의원직을 수행하다가 2022년 재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 당시 생존했던 버넌 고즈니는 이후 하와이주 경찰로 근무하면서 방송에서 사건에 관련한 증언을 하였고 2010년 정년퇴임 후 여생을 보내다가 2021년 1월 31일 심근경색으로 향년 68세로 사망했다.

한편 인민사원은 사건 이후 1978년 12월 4일 교단 측 변호사인 찰스 게일리로부터 파산을 신청하였으며 이듬해 1월 샌프란시스코시 지방 법원의 판결에 따라 교단 내부 자산을 전량 매각함과 동시에 소수의 생존 신도 전원은 본국인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 후 샌프란시스코와 인디애나폴리스 소재 교단 본부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에 넘겨졌으나 샌프란시스코 지부는 1989년 캘리포니아 북부 지진으로 붕괴 후 재건되어 현재는 미국 우정공사가 사용하고 있다.

음모론들

흔히 앞서 언급된 Q042가 존스타운의 마지막 기록이라고 생각하지만 Q875라고 불리는 학살 다음 날에 라이언 의원과 일행들이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는 것이 가이아나 라디오 뉴스로 방송된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 문이 열리고 닫히거나 여자와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리는 기이한 테이프로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했는지 알 수 없을 따름이다. 생존자들은 광란의 학살을 피하기 위해 정글에 숨어 있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가이아나군인데 이게 맞다면 가이아나군이 최초의 발견자이나 미국 수사관들이 도착하기 전에 사건 현장을 건드렸다는 문제가 생긴다. 물론 존스가 19일 오전에도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며 본인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건 초기의 라디오 뉴스 보도를 녹음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녹음된 목소리가 존스 및 그 측근들의 것일 가능성이 높고 해당 테이프의 뒷면에 "죽었어(He's dead)"라는 말이 녹음되어 있는 것을 보아 존스의 자살 직후까지 녹음을 계속하고 있었으리라는 의견이다.

워낙 괴이한 사건이다 보니 당연히 음모론이 등장했다. 음모론에 따르면 존스는 미국 정부의 의뢰로 집단 최면 실험을 진행하는 중이었고 캘리포니아나 가이아나에 정착하는 데 든 비용 등이 전부 미국의 비밀 자금이었다고 한다. 미 하원 조사단이 방문하여 이런 사실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존스와 미국 정부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조사단을 살해하고 피실험자(신도)들을 집단 자살 시켰는데 이러한 작업을 존스를 지원하고자 남미에 주둔 중이던 그린베레 대원들이 수행했다는 설이다.

다만 음모론을 떠나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는데 Q042에서 주가이아나 미국 대사관의 로버트 드와이어 부국장이 언급된다는 점이다. 존스가 "드와이어를 동쪽 집으로 데려가라. 여기서 일이 나기 전에 드와이어를 내보내라."라고 말한 내용이 녹음되어 있어서 이 녹음대로면 드와이어가 당시 존스타운에 있었고 존스가 그를 내보내도록 지시했단 말이 된다. 심지어 드와이어는 각종 음모론의 단골 주체로 나오는 CIA의 요원이었음이 밝혀졌다. 정부 요원을 항상 비난해 왔던 존슨이 핵심 정부 요원과 친하게 지내 왔던 것.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진상은 밝혀진 게 없다.

이모저모

  • 라이언 의원의 맏딸은 아이러니하게도 오쇼 라즈니쉬의 사상에 공감해 그 공동체에 아버지의 사망 보상금을 모조리 때려 넣었다고 한다.
  • 꽤나 유명한 학살 사건이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서구권 창작물에서 가공의 사이비 종교의 모티브로 잘 쓰인다. 대표적으로 심슨 가족에 나오는 무브먼트교도 인민사원과 교리가 비슷하다.
  • 이 사건으로 인해 북미권에서 '쿨에이드를 마시다. (Drink the Kool-Aid)'라는 표현은 "무언가를 심각할 정도로 믿는다." 라는 뜻의 은어가 되었다. 링크 더불어 사이비 종교의 집단 자살을 빗대 표현할 때도 쓰인다.
  • 이 사건은 9.11 테러 이전까지 20년 이상 가장 많은 시민의 생명을 빼앗아 간 단일 사건이었다. 무려 918명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