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대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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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도쿄 대공습(東京大空襲) 또는 미팅하우스(예배당) 작전(Operation Meetinghouse)은 일본 본토 공습 작전의 하나로, 미군태평양 전쟁 시기 실시했던 도쿄 폭격(Bombing of Tokyo) 작전, 특히 그 가운데 1945년 3월 9일에서 10일 사이 대량의 네이팜탄을 이용하여 전략 폭격을 감행했던 사건을 가리킨다.

가장 규모가 컸던 3월 9일 ~ 3월 10일의 공습은 도쿄 중심부로부터 41㎢에 달하는 지역을 파괴하였으며 약 1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당시 미군이 군사시설 뿐만 아니라 민간인 거주지에도 폭격을 가하는 등 민간인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 없이 작전을 세우고 실행했기 때문에 드레스덴 폭격과 함께 연합국의 폭격 작전 중 인도적인 논란이 가장 크다.

전개

배경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은 작전 반경의 한계 때문에 처음에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1942년 4월 18일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으로써 첫 폭격을 행한 둘리틀 특공대는 일본 전체에 충격을 줬다기보단 그저 대본영에 충격을 주었을 뿐이며 당시 둘리틀 특공대가 운용했던 B-25는 중(中)형 폭격기었고 숫자도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큰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자국의 사기 진작을 시급히 원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요구를 가까운 시일 내에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항공모함에서 발진할 수 있으면서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는 폭격기가 당시 B-25가 그나마 가장 적절했다고 했고 그마저도 착함은 불가능해 폭격한 뒤 중국으로 향했다.

이 때문에 일본 본토 공습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는 거대하고 많은 폭약을 실을 수 있었던 최신 B-29 폭격기였다. B-29는 6000㎞에 달하는 작전 반경을 자랑하고, 당시 기술로써는 대공 방어가 어려워지는 3만 피트 이상의 상공에서 항공 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으며, 당시 일본군의 지상 방공망이 빈약해 지대공 격추가 불가능했던 데다 제로센도 B-29가 3만 피트 이상 비행하면 고도제한으로 인해 요격이 불가능했다. 전쟁 당시 일본 본토에 투하된 항공 폭탄의 90% 정도가 이런 식으로 투하되었으며 연합군이 사이판과 같은 일본 본토에서 가까운 섬들을 점령하면 그 섬에 비행장을 건설해 B-29의 일본 본토 공습 임무를 수행시킬 수 있었다.

최초의 공습은 중국 본토로부터 시행된 제20폭격기사령부의 '마테호른 작전'이다. 중국국민당과 동맹 관계인 미국은 중국 내륙의 비행장들을 이용할 수 있었고 B-29가 쿤밍, 충칭에서 발진한다면 규슈와 같은 일본 본토 서부 지역을 작전 반경 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20공군에 의해 수행된 이 작전은 일본군의 점령지를 너무 많이 지나야 하는 탓에 고고도를 오래 비행해야 하는 부담이 강요되었으며 이는 곧 B-29가 도쿄까지 도달할 수 없게 만들고 폭장량의 반의 반조차 쓰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일본 본토에서 충분히 가까운 북마리아나 제도로부터의 폭격 작전은 1944년 11월 제21폭격기사령부가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미 육군 항공대의 조사 결과 재래식 항공 폭탄을 이용한 고고도 폭격은 폭탄을 목표에서 벗어나게 하는 '정체불명의 강한 바람'(제트기류) 때문에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이판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군을 사이판 북쪽으로 몰아낸 후 불과 1~2개월 만에 숲이 무성했던 중부 사이판 평원에 B-29를 위한 활주로 5~6개 이상과 관제탑, 유류고, 정비창, 막사 등 주요 기반시설을 완비한 대형 비행장인 이슬리 필드를 건설했다.

그러나 어렵게 확보한 전략 기지인 사이판·괌에서 출격한 B-29 폭격대의 초기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 당시 일본군은 이미 쇠퇴된 공군력에도 불구하고 J2M 라이덴, Ki-45 토류 등으로 반격에 나서 1~3%의 손실을 미군에게 꾸준히 강요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미군은 일본 본토 공습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군의 주요 폭격 전략은 일본군의 방공 수단이 도달하기도 힘든 7,000~9,000m 이상의 안전한 고고도에서 폭탄을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기류가 비교적 안정적인 유럽 상공에서는 효과적이었으나 제트기류의 영향이 있는 일본 상공에서는 폭탄의 명중률을 상당히 떨어트리는 요인이 되었다. 고고도에서 투하되는 폭탄들은 제트기류를 만나 마치 건물 옥상에서 뿌려진 종잇조각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낙하 탄도가 엉망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고고도에서 운항하기 위해서는 사용 가능한 폭장량은 절반 이하에 불과했다.

이러한 전략 상의 하자로 인해 무사시노에 위치한 군수 공장을 폭격할 때는 B-29 약 100여 대가 출격하여 1천 파운드의 폭탄 수천 발을 투하했으나 그 명중률은 고작 2%에 불과했다. 이 시기 도쿄에도 공습이 가해졌으나, 대다수 도쿄 시민들은 당연하게도 이를 심각한 상황으로 여기지 않았다. 민간인들 입장에서는 명중률도 낮은 산발적인 폭격인데다가, 시가지가 아닌 시 외곽의 군수시설이 대상이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폭격에 대비하기보다는 생업에 종사하는 것에 더 집중했다.

결국 미국 정부, 심지어 합참 소속의 육군, 해군까지 이러한 실망스러운 폭격 성과에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미 30억 달러라는 2차 대전 단일 프로젝트로는 최고로 큰 돈을 들인 B-29를 어떻게든 활용하여 작전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에도 시달렸을 것이다. 때문에 21폭격사령부의 상위 부대인 20공군사령관을 겸임하던 헨리 아놀드 육군 항공대 대장은 참모장인 로리스 노스태드 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1945년 1월까지 일본 열도 폭격작전을 지휘하던 전략폭격대장(제21폭격사령부 사령관)을 기존의 정밀폭격 신봉자 헤이우드 핸셀 소장에서 유럽 전선에서 맹활약하며 어떻게든 상관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던 커티스 르메이로 바꾸게 된다.

작전 수립

일본의 산업 역량을 완전히 무력화하라는 명령을 받은 커티스 르메이는 일단 전임자인 헤이우드 핸셀 소장이 그랬던 것처럼 민간인 거주지역을 피해 산업지대에 다시 한 번 고고도 폭격을 시험해 봤지만 결과는 역시 형편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안전하지만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주간 고고도 폭격은 집어치우고 대공방어가 취약해지는 야간에 B-29를 대량으로 투입해 1,500 ~ 3,000m의 저고도에서 한꺼번에 폭탄을 들이붓는 것이었다.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르메이는 주간 고고도 폭격 전술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도 전임 지휘관인 핸셀 본인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았다. 핸셀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전술 자체에 결함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

겉보기에 자살 돌격처럼 보이는 이 명령에는 몇 가지 계산이 숨어 있었다.

  • 우선 고도 2,000m는 기관포와 같은 소구경 대공화기가 제대로 닿지 않으면서도 대구경 대공포는 시한신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높이였다. 영국 공군의 야간폭격에 대해 대전 초부터 충분한 경험을 쌓아온 독일의 방공망이라면 대공포를 낮게 조준해서 다가오는 폭격기 대열에 멀리서부터 포격을 가했을 수도 있겠지만 야간 방공 능력이 없는 일본은 저공으로 날아드는 폭격기를 제대로 타격할 수단이 없었다.
  • 기습을 포착하고 대응할 수단이 없었으므로 전투기가 제대로 방공임무를 수행할 리도 만무했다. 전투기를 어찌저찌 띄운다 해도, 저고도 비행하는 폭격기를 줄줄이 떨어뜨릴 만한 훌륭한 조종사들은 이미 다 죽거나 자기들이 죽여 버린 뒤였다. 르메이는 이런 기습을 통해 아군의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또한 일본군이 모종의 방법으로 폭격기를 일찍 포착하고 요격을 시도한다 해도 이 시점의 미군은 P-51 머스탱이라는 완벽한 호위기를 폭격기 편대에 붙이기 시작해 요격기들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 그리고 비교적 안전한 야간폭격으로 폭격기의 빠른 이탈을 막아 연료 소모를 최소화하여 결과적으로 폭격기 설계 시에 상정한 대로 폭장량을 최대로 채워넣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폭탄 과적을 목적으로 외부 탑재 파일런을 장착하는 현장개수가 시행됐음을 고려하면, 당시 폭장량을 초과한 상태로 작전에 나선 폭격기들도 많을 것이다.

그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당시 대부분의 일본 가옥이 목조건축으로 지어졌다는 이유를 들어 기존에 사용하던 고폭탄은 집어치우고 B-29에 소이탄을 한가득 채워 보내기로 했다. 고폭탄 60%에 소이탄 40%였던 기존의 폭장 비율을 소이탄 100%로 변경하고 폭격 소티 수를 대폭 늘려서 일반적인 작전이라면 2달 동안 쓸 수 있는 소이탄 물량을 5일 안에 퍼붓기로 한 것이었다.

드레스덴 폭격의 결과를 제21폭격기사령부 전체와 르메이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민간인 피해가 크게 발생할 것임은 자명했고 이를 지적하는 부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르메이의 관점에서 이들은 단순한 민간인이 아니라 일본의 공장 노동자, 즉 일본의 군수 산업 역량 그 자체였으므로 이 산업 역량을 무력화시키려면 결국 공장 노동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르메이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부하들한테 "사실 저 밑의 스즈키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하루노보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걸 가내수공업이라 하지."라고 설명하면서 민간인 피해에 대한 지적을 상큼하게 무시했다. 전후에도 이에 대해서는 '전쟁에서는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비행기 한 대에 부품 약 3천 개가 필요하다. 그 부품 중에는 가정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약 절반이다. 이처럼 가정에서 만들 수 있는 부품 제작까지 공장에만 맡겨도 좋은 걸까? (중략) 이미 이런 결의에 불타올라 가정에서 또는 도나리구미 공장, 자치회 공장 등에서 묵묵히 항공기 부품을 만드는 주부들이 적지 않다.


주부의 벗(主婦之友) 1944년 10월호 중

그리고 일본은 진짜 가내수공업으로 항공기 부품을 만들고 있었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주부들의 잉여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간단히 할 수 있는 조립작업이나 부품 제작을 부업의 형식으로 가정들에 맡겨 버리고 이의 생산을 독려한 것이다. 다른 국가들에서도 여성 노동력을 동원하긴 했지만 이들은 정식 노동자로서 공장에 출근했고 민간 가정의 여성들과 군수공장의 노동자들은 서로 분리된 상태로 관리되었다. 따라서 르메이의 스즈키 네 운운 이야기는 일본의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본 것이다.

네이팜탄(소이탄)의 사용 이유

르메이는 중국-버마-인도 전선에 가 있었던 시절인 1944년 12월에 일본군 제6방면군 사령부가 있던 한커우(漢口)에 대규모 소이탄 공습을 가하고 위력을 확인했다고 했으며 일본에서도 효과가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1945년 2월 4일에는 고베를 공습하고 2월 25일에는 도쿄에 소이탄 공습을 가해 260헥타르 면적을 파괴하면서 소이탄의 위력을 다시 확인했다.

소이탄을 쓰기로 한 원인 중 하나는 육군 항공대에서는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쓰는 동안 해군 항공대에서는 소이탄만으로 폭격해서 성과를 내는 것을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르메이가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쓰던 기존의 방법을 집어치우고 소이탄 100%를 쓴 저고도 폭격으로 폭격 방침을 바꾼 결정적인 배경은 일본 본토 공습을 참고하자.

당시 일본의 가옥은 90% 이상이 목재로 지은 목조건축이었다. 이는 누군가 작정하고 불을 지르면 쉽게 타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건축물 재료가 주로 목재라는 것은 빌리 미첼(Billy Mitchell) 준장이 1924년에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평가하면서 작성한 보고서에서도 강조되었던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드레스덴 폭격의 결과를 통해 소이탄의 위력을 폭격기 승무원을 비롯한 육군 항공대 전체에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나 이런 사실을 무릅쓰고 소이탄을 투입한 이유는 3가지였다.

  • 첫 번째는 몰락 작전 실행이 1년 이내로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전략 폭격으로도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꺾지 못하면 결국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 본토를 직접 침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정도나 인명손실을 입을지 모르는 몰락 작전을 수행할 필요가 없도록 압도적인 화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찍 끝내야 일본 민간인도 덜 죽고 미군 장병들도 무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 2번째로, 당시 미군 폭격기가 수행하던 고고도 폭격으로는 폭격의 정확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당시의 최첨단 정밀 폭격용 조준기인 노든 폭격조준기조차 원형 공산 오차(圓形公算誤差)가 20~370m로 고도에 따라 조준 성능이 크게 벌어졌던 탓에 특정 건물을 정확하게 노려서 폭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도 기류가 비교적 안정적인 서유럽에서도 명중률이 이랬는데 일본 상공에서 불어대는 제트기류로 인해 아무리 정밀 조준해서 폭격을 한다 해도 폭탄들이 제트기류에 휘말려서 폭탄의 탄도부터 엉망이 되며 폭격 정확도는 개판이 된다. 즉 특정 건물을 노려서 폭격한다 해도 떨어지는 폭탄들이 바람에 휘말리면서 탄착지점이 투하시 겨냥한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는 것이다. 일례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서도 원자폭탄이 투하 예정지에서 벗어나서 떨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애초에 커티스 르메이의 전임자이며, 정밀폭격론자였던 헤이우드 셰퍼드 핸셀이 제21폭격기사령부에서 전출된 원인도 이것이다. 그래서 르메이는 제트기류를 피해 저공으로 폭격을 가하고, 이왕 저공으로 폭격을 가할 것 같으면 좀 더 광범위한 범위에 피해를 입힐 목적으로 소이탄을 선택한 것이다.
  • 마지막으로 소이탄의 파괴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당장 유럽전선에서 석조 건축물 위주였던 드레스덴에 가해진 드레스덴 폭격에서도 발군의 파괴력을 보여준 게 소이탄이었다. 고폭탄과 테르밋 소이탄의 혼용을 통해 석조 건축물 위주인 드레스덴을 완파시켰는데 목조 건축물 위주의 도쿄도 스미다구, 시타야, 아사쿠사구 등 목조건물 밀집지역은 뭘 어떻게 해도 무사할 수 없었다. 거기에 때마침 비록 최고 온도는 기존 소이탄보다 낮더라도 연소재로 항공기 제조 때문에 공급이 부족한 알루미늄, 마그네슘이 아닌 가솔린을 연소재로 사용해 대량생산 가격 또한 상대적으로 저렴하며 끈적끈적한 가솔린젤이 불이 붙은채 폭발과 함께 사방팔방으로 퍼져 목조건축물의 경우 한 발로도 완파를 시킬 수 있는 소이탄이 무려 38개가 들어가는 M69 집속 소이탄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된 무사시노의 항공기 공장을 폭격할 때 르메이와 핸셀은 무려 15번이나 고고도에서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쓴 정밀 폭격을 했는데, 해군에서 행한 단 한 번의 급강하 폭격기 저고도 소이탄 폭격의 효과가 이와 비슷한 것으로 밝혀진 것도 르메이의 폭격방침이 바뀌는 근거가 됐다.

중일전쟁 중 일본군의 충칭 대공습을 비롯한 중국 도시 폭격 방법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간단히 말하면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에 쓴 폭격 때문에 미국에게 무차별 폭격을 그대로 되돌려 받았다는 말이다. 실제로 미군의 정훈교훈에서 B-29의 승무원들이 대도시에 대공습을 퍼붓는 것에 머뭇거렸다는 것을 알고 미군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충칭 대공습과 같은 일본 제국과 일본군의 만행들을 사례로 거론하며 정훈교육을 하여 일본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돌려받는 것임을 상기시켰다.

도쿄 대공습 전에 커티스 르메이에게 영감을 준 2가지 공습 사건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위에서 언급된 드레스덴 폭격이고 2번째가 다름아닌 이 충칭 대공습이다. 그뿐 아니라 커티스 르메이의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말이 충칭 대공습 당시 소이탄을 전쟁 자체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민간인 거주지역에 투하해댄 일본군을 보고 한 말이라는 설도 있다.

일본의 건축물은 목조가 대부분이라는 조건에서 비롯되는 약점은 일본도 인식은 하고 있었다. 워낙 목조 건축물이 많으니 메이레키 대화재 등 역사적인 대화재도 여러 번 겪었고 화재에 예민해진 덕분에 수백 년 전부터 민간 의용 소방대가 치밀하게 조직될 정도로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해 왔다.

이런 약점에 처해 있던 차에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대본영은 시내에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서는 화재가 빠르게 확산됨을 막을 수 없을 테니 시내를 일정 구역으로 나누고 사이사이에 화재 확산을 막고자 방화대(防火帶)라는 빈 공간을 만들었다. 방화대 자체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당시 샌프란시스코 소방대가 선보인 적이 있는 사례가 있듯 서양에도 있던 전술이었으나, 일본은 전체주의 국가답게 그 방화대 안에 있던 원래 가옥은 아무 보상없이 그냥 헐어버렸다. 또 시내 곳곳에 방화수조, 물을 채운 구덩이 등을 마련했는데 이 탓에 모기 떼가 창궐해 이미 반 년이 넘는 소방훈련에 지친 도쿄 시민들을 더 힘겹게 했다.

그러나 이 힘겨운 때가 정말 행복했던 시간이었음을 일본인들이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본이 나름대로 세운 화재 대책도 미군의 실제 폭격 앞에선 아이들의 소꿉장난에 불과했다.

작전 개시

커티스 르메이는 소이탄 폭격작전을 예배당 작전(Operation Meetinghouse)이라고 이름 붙이고 폭격기를 준비해 1945년 3월 9일 밤 ~ 10일 새벽에 걸쳐 사이판과 티니안 섬에서 344기의 B-29가 출격했다. 이들은 기존의 고고도 폭격 대신 5천 피트(1524m)의 저공에서 폭격기 1대당 7톤씩, 소이탄(네이팜탄) 총 2400여 톤을 도쿄에 떨어뜨리기로 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비행기 무게를 줄여 비행속도를 높이고 폭탄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폭격기 후방 기총을 제외한 모든 방어기총과 탄약을 제거한 후, 로버트 K. 모건 소령의 지휘하에 폭격에 나섰다.

도쿄시각으로 3월 9일 밤 10시 30분 NHK 라디오 방송이 B-29 편대의 도쿄 접근을 알렸다. 적기에 관한 정보는 도쿄만(東京灣)으로부터 남쪽으로 오가사와라 제도까지 이어진 일련의 섬에 배치된 감시원들에 의해 잇따라 중계되어 들어왔고 얼마 후 첫번째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몇 시간 뒤인 밤 12시 직전 제 1번기가 동쪽으로부터 저공으로 급히 접근하여 30㎏짜리 네이팜탄 뭉치를 풀어 놓았다. 그것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지상에서는 화염이 선을 그리며 분출하여 밤하늘을 밝혔다. 제 2번기는 스미다강(隅田川) 상공에서 제 1번기의 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소이탄을 투하했다. 제 1번기와 제 2번기가 교차하며 던진 소이탄으로 도쿄의 공장, 상점, 소주택이 몰린 도쿄의 동북지역에 거대한 불의 X자가 조용히 그려졌다. 그리고 곧 이어 불의 X자를 표지 삼아 폭격기 280여 대가 폭음을 울리며 3000m의 고도로 진입해 왔다. 책상에 올려 놓은 찻잔 속의 녹차가 밖으로 튈 정도로 도쿄 시민들은 그렇게 낮은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B-29의 엔진 폭음과 진동이 울려퍼지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6시간 동안 300여 대가 넘는 B-29들은 도쿄 상공에 E-46 확산탄 8500발과 M-69 소이탄 자탄 50만 개, 네이팜 소이탄 총 1700톤을 투하했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린 네이팜탄과 기름뭉치들은 도쿄 시내 8500여 곳에 떨어졌고 순식간에 불꽃이 밤하늘 30m 높이까지 치솟으며 치명적인 화재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여기에 애초부터 불어 오던 27 ~ 45 ㎞/h의 지상풍이 만나자 화염은 순식간에 옆으로 위로 사방 팔방으로 기세좋게 뻗어나갔다.

처음 15분 동안에 목조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구역이 소이탄으로 거대한 불구덩이로 변했고 화재로 가열된 공기는 팽창하며 위로 치솟았다. 그리고 다시 주변의 공기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여 풍속은 점점 강해졌다. 이 격렬한 대류 현상은 거대하게 소용돌이치는 불기둥을 만들었으며 18㎧(64.8㎞/h)를 넘는 강풍은 불붙은 연소물들의 잔해를 빨아올렸다가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리고 이렇게 퍼져나간 불티들은 다시 잔불을 일으키며 화재를 확산시키고 작은 화재들이 다시 합쳐져 더욱 더 화재를 키우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불의 쓰나미는 골목길과 애써 만들어놓은 방화대 따위는 있지도 않은 것처럼 수십~수백 m를 우습게 뛰어넘어서 경로상에 위치한 목재든 인체든 가리지 않고 모든 유기물을 닥치는 대로 삼켜나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불이 모든 것을 태우고 스스로 꺼지거나 큰 비가 내리는 것 외에 인력으로는 소화가 불가능하다. 화재 예상 진로상의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방화대를 구축하는 정도가 한계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소방훈련 때 배운 대로 실천하려고 했다. 소이탄에 물이나 젖은 걸레를 퍼붓기도 하고 양동이 릴레이를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일본제국 경찰, 경찰 소방대와 의용소방대, 훈련받은 민간요원들이 지시하는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당시의 행동지침을 다룬 군가 겸 가요도 존재했다.가사 정부 당국은 각 동네의 시민들이 자기 할 일을 완수하면 그 동네들은 무사할 것이고 결국 도시 전체가 무사할 것이라고 말해 왔지만 200대 이상의 적기가 네이팜탄뿐 아니라 기름이 가득찬 2.5톤짜리 폭탄을 2.6㎢당 1개꼴로 투하하고 그로 인한 화재 그 자체가 불의 폭풍처럼 회오리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국 화재 진압을 시도하던 사람들은 단 1시간만에 화재진압을 포기했고 모조리 화재에 휩쓸려 사망했다. 경찰은 사람들을 방화대, 공터, 혹은 이미 모든 게 다 타버린 장소로 이동시키려고 노력했고 소방대원들은 살아남은 몇 개의 소화전을 통해 화염에 휩싸인 거리를 뛰어다니는 사람들 몸에 물을 뿌려줬지만 화재선풍이 28㎧(100.8㎞/h)에 가까운 속도로 사방팔방에서 덮쳐오는 상황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 타죽지 않은 사람들조차 불이 산소를 모두 태워 버린 탓에 뜨거운 연기 속에서 질식해서 숨졌다.

도쿄 동북쪽에는 피난민들이 센소지(浅草寺)라는 절에 몰려들었다. 그 절은 오랜 세월 도쿄의 숱한 화재들 속에서도 한 번도 불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절이 관세음보살의 가호를 입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내의 정원에 불이 옮겨붙자 한 순간에 절의 목조 건물과 수많은 수목들은 거대한 화장(火葬)용 장작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에도 막부 시대부터 내려오는 유명한 공창가인 요시와라(吉原)가 있었다. 접대부들의 탈주를 막고 외부에서의 화재를 막기 위해 큰 철문들이 닫히게 되어 있었는데 수많은 접대부와 손님들이 그 철문 안에서 불에 타 사망했다.

도쿄 남쪽의 니혼바시 근처에서 경찰들은 피난민들을 유명한 극장인 메이지좌(明治座)[38]로 피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도쿄를 가득 메운 불에 극장 안의 산소도 부족해졌고 마침내 무대의 막에 불이 옮겨붙자 극장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장로(火葬爐)로 돌변했고 극장 안으로 피신해 있던 사람들은 그냥 산채로 화마(火魔)의 먹잇감이 되어 버렸다.

도쿄 동북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아라카와강은 화염 폭풍으로부터 안전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양쪽 기슭에서 수만 명의 도쿄 시민들이 아라카와강의 관개수로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네이팜은 얕은 수로에서도 꺼지지 않고 잘만 타올랐으며 주변의 산소를 모조리 빨아들여 강에 뛰어든 사람마저 질식시켰다.

네이팜탄의 불길 확산을 위해 같이 투하된 2.5톤 규모의 기름 폭탄은 강렬한 불길을 지속시켰다. 드레스덴에서 소이탄에 희생된 사람들의 상당수도 이런 죽음을 맞았다. 불길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화염 때문에 폭격을 하던 폭격기 동체가 달궈져서 작전 수행이 어려워졌을 정도였고 사람의 시체 타는 냄새가 폭격기 조종석에까지 미쳐 승무원이 구역질을 했기 때문에 산소마스크가 필요한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도쿄를 공습한 B-29 폭격기는 고고도 폭격을 위해 유일하게 여압식 캐빈을 채택한 최신예 항공기였다. 양압 장치가 있어 외부의 공기가 쉽게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는데도 시체 타는 냄새가 동체를 비집고 들어올 정도니 공습으로 인한 화염 폭풍이 만들어낸 상승기류와 시신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미군의 본격적인 폭격으로 도쿄는 밤에는 시뻘겋게, 낮에는 새카맣게 타올랐으며 3월 9일 밤 12시에 시작된 공습은 3월 10일 새벽 5시 공습 해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끝났다.

루머

열기로 인해 부분적으로 수로의 물이 끓어오르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화재를 피해 강에 뛰어든 사람들이 죄다 펄펄 끓는 뜨거운 강물 속에서 삶아져 죽었다는 루머가 퍼졌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앞서 말했듯이 화염선풍으로 인한 산소 부족으로 질식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강에 뛰어든 사람들이 모두 삶아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미국의 역사학자 존 다우어(John Dower)가 1986년 쓴 War Without Mercy에 나오는 내용과 생존자의 증언이 와전된 것이다. 책 자체가 미국의 전쟁범죄를 다루기 위해 이러한 서술이 들어갔지만 책의 서술에도 나오듯이(some places) 그것이 도쿄 대공습 당시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물질 중 상당히 비열이 높은 편에 속하는 물질이며 아라카와강이 한강 같은 큰 강보다 좁고 얕다고 해도 공습으로 인한 대형 화마 정도로 100℃ 의 수온을 몇 시간 동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라카와강은 갇힌 호수가 아니기에 계속해서 상류에서 물이 흘러내려온다. 그러므로 새로 흘러들어오는 물을 지속적으로 끓는점까지 가열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아무리 도쿄가 목조 주택이 많아도 도시 화재정도로는 강 전체와 새로 공급되는 수원지의 유량을 충분히 가열할 에너지가 부족하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도 강에 빠진 사람들이 삶아져 죽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실제로는 끓는 네이팜이 수로에 흐르기 시작하자 물이 끓긴 했는데 네이팜의 끈적한 기름막을 수증기가 뚫지 못해 계속 압력이 증가하다가 결국 네이팜 막을 뚫고 튀면서 폭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물이 있는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라는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강 전체가 끓었다기보다는 곳곳의 물웅덩이에서 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폭발이 일어나게 되면 불타는 네이팜 방울이나 조각이 튀어서 상승 기류를 타고 위로 빨려 올라갔다가 떨어지는데 이는 생존자들이 보기에 불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오히려 수로로 대피한 수천 명의 도쿄 시민들은 목숨을 건졌으며 강에서 나올 엄두를 못 내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사람들도 꽤 많았다.

끓어오른 스미다강에 뛰어든 도쿄 시민들이 삶아져 죽었다는 루머는 여러 사실들이 합쳐진 결과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아라카와강은 말이 강이지 역사적으로 치수가 어려워 수많은 관개로가 있었으며 그 중에는 얕은 수로도 있었다. 수심이 얕아 웅덩이에 가까운 수로의 물은 열기에 의해 끓어올랐으므로 도쿄 시내의 강이 (부분적으로) 끓어올랐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화염을 피해 강에 뛰어든 시민들이 (산소부족으로) 죽은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런데 이 두 사실이 교묘하게 결합되면서 '화재를 피하기 위해 끓어오른 강에 뛰어든 사람들이 죽었으니 삶아져 죽은 거겠지?' 라는 추측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

결과

이 도쿄 대공습으로 도쿄는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대공습 직후 도처에는 누군지 알아볼수도 없을 만큼 심하게 손상된 시체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스미다강을 따라 걸어간 한 군의관은 강 기슭에 쌓인 시체들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다.

표류하는 수많은 시체를 봤다. 옷을 걸친 시체도 벌거숭이 시체도 모두 목탄처럼 검게 타 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시체인 것은 틀림없는데 남녀를 분간할 수조차 없고 그 곁을 떠내려가는 물체가 팔인지 다리인지 아니면 불탄 나무조각인지도 식별할 수 없었다.

반상회 조직은 살아남아서 식량조달과 임시거처 마련을 위해 힘썼으며 일본군이 파견되어서 시체들을 수습했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시체는 100구씩 모아서 커다란 공동무덤에 매장했다. 3월 10일 아침부터 수십만 명 규모의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철도는 빠른 속도로 복구되어 이들을 실어날랐다. 폭격 단 한 차례로 대략 가옥 25만 동이 파괴되었고 180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도심 약 40㎢가 잿더미로 변했다. 사망자 숫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하게 집계하지 못했다. 정부는 12만 명이 사망했다는 신문 보도도 발표하지 못하게 막았는데 프랑스인 기자 로베르 기얭(Robert Guillain)은 사망자로 간주되는 피해자 수가 19만 7천 명이라고 보고된 문서를 접했다고 한다.

일본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 8만 3793명, 중상자 4만 918명, 이재민 100만 명 이상이 발생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치면 피해자가 약 20만 명에 달하여 피해가 원폭 이상이다. 공습 피해 및 소개(疏開)로 인하여 1940년 730만이었던 도쿄 인구는 종전 직후 350만까지 줄었다.

게다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직후에는 도쿄 핵폭격 계획도 입안되었다. 원래는 더 부술 것도 없는 폐허인지라 핵무기 투하 목표 지점에서는 진작 빠져 있었지만, 칼 스파츠 장군은 도쿄에 아직 남아 있는 대본영의 고위 관료들을 노리고 원폭을 투하해야 일본 수뇌부가 확실히 항복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도쿄 핵폭격을 입안하였다. 다만 우선순위 자체는 고쿠라니가타에 있었고, 3차 핵폭격 자체도 일본의 항복으로 취소되었다.

관동대지진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계획도시로 복구한 일본 제국의 수도 도쿄는 이 작전으로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도쿄에서 과거 에도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사이타마현카와고에시는 옛 에도 분위기의 길거리가 보존된 것으로 유명한데 원조 에도인 도쿄는 전쟁 이후 폐허 위에 현대식 건물들이 세워지고 고도 성장기에는 거의 무계획적으로 확장되었으며 이후에는 도시재생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탓에 이런 곳이 거의 남지 않았다.

안타까운 피해 사례가 있는데 당시 김정희의 자료들이 이 폭격으로 대거 소실되었다. 당시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란 인물은 완당(김정희의 아호)에 관심이 매우 깊어서 그의 글과 그림 등의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서예가인 손재형은 후지츠카 치카시를 찾아가서 세한도를 돌려달라고 간청했고 오랫동안 설득한 끝에 세한도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폭격으로 치카시의 서재도 전소되면서 김정희의 자료들이 대거 소실된 것. 손재형의 설득이 아니었다면 세한도마저 소실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 공습으로 하루 만에 10만여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조선인 희생자가 10% 정도로 알려져 있다. 도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사무국장을 지낸 이일만 씨는 여러 자료를 근거로 당시 조선인 희생자를 약 1만 명으로 추산한 바 있다.

충견 하치 공 (하치코) 의 유골로 만들어진 순종 아키타견 골격 표본 역시 이 때 소실되었다.

평가

의의

도쿄 대공습은 일본의 수도를 불타는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공습이었다는 점에서 일본 제국에 충격을 주고 일제의 패배를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되며, 전술적으로는 미군이 제공권을 획득한 상태에서 치밀한 준비 속에 실행하여 큰 성과를 거둔 성공적인 작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 미군의 편제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 형성 전술적 측면에서 보자면, 도쿄 대공습은 미군이 평가하기에는 별 효과가 없었던 일반 폭탄을 이용한 고고도 수평 폭격 대신, 미군의 공습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냈던 작전이었다고 평가되는데, 이 공습의 성공으로 인해 미 육군 항공대의 완전 독립과 미 공군 창설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진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 일본 국민의 동요 폭탄을 퍼부은 미국 측에선 일본인들의 일인십살 죽창 운운하던 최후 항전 이야기 때문에 이 쪽으로 별 기대는 안 했다고 하는데, 일본 쪽의 기록에 따르면 국민들의 민심이 대단히 요동쳤다고 한다.

이 사건 전까지 일본인들에게는 진주만 공습, 미드웨이 전투, 과달카날 전투, 이오지마 전투, 동남아에서의 일본 육군의 몰살 등등의 이야기는 그냥 일본 밖 멀리 있는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했다' 정도로 남 일처럼 취급되었고, 이오지마 전투 전까지만 해도 전쟁 수행국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폭격 이후로 비로소 일본인들은 '전쟁'을 실감했다. 폭격에 대한 피해가 적었다는 이유로 신이 지켜주는 나라 운운하던 믿음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초장거리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완전히 깨졌고, 커티스 르메이가 여러 시행착오 끝에 정답을 찾아 일본의 수도를 싹 태워 버림으로써 이 도쿄 대공습은 원자폭탄 투하와 함께 대부분의 일본인들의 기억 속에 '직접 피부로 접한 전쟁'으로 남게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전쟁에 나간 아들이 천황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사회적 지위와 명망이 높고 가진 돈도 많아 도시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전쟁 지지자들은 미군이 일본 도시 전략 폭격을 본격화하고 자기 목숨이 위험해지자 폭격을 피해 다 시골로 튀어버렸고, 당연히 피해는 도망가지 못한 하층민과 노동자들에게 집중되었다. 또한 이 사건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일본 전역으로 확대된 융단폭격은 일본인들의 전쟁 의지를 아주 크게 꺾어 버렸다. 하지만 일본에게는 반기를 들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 규슈 상륙작전(올림픽 작전) 시행을 위한 준비 규슈 상륙 전에 이와 같은 네이팜 폭격과 상륙지에 원자폭탄 투하가 예정되어 있었다. 미군이 투입될 상륙작전지에 핵을 사용하려 한 것은 그 당시 방사능의 위험을 맥아더 장군을 포함한 장성들과 과학자들이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 군 시설과 군수공장의 괴멸 이 시기 이미 도쿄는 관동대지진으로 한 번 박살이 난 뒤 재건된 상태였다. 하지만 누가 재건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나 시가지 내에 민간인 거주지와 군사시설이 무분별하게 뒤섞여 있었다. 물론 이런 무질서한 도시계획은 미약한 산업기반만으로 군국주의 국가로 발달한 일본에선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밖에 없었는데, 요약하자면 대형 공장을 세우고 이를 채울 최신 산업설비를 갖출 능력이 없이 수공업 따위에만 의지하니 주택가와 공장이 섞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흔적은 서울에도 남아 있는데, 을지로 5가에 있는 주한미군 공병대가 일제강점기 일본군 병영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과, 또 을지로 한복판의 공구 상가나 소규모 영세 공장들과 주택들이 마구 뒤섞인 독산동같은 곳들이 있다. 이러한 예를 생각하면 군사시설, 거주지, 산업시설이 뒤섞인 일본의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또, 21세기와 비교해 보면 노동자들이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부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직주근접의 필요성이 더더욱 컸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일본의 자동차 공업은 매우 미약한 수준이었고, 전쟁 중에는 아예 연료 부족으로 목탄버스가 일상적으로 운행되기도 했었던 것을 감안하면 모든 시설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일본 쪽의 기록에 따르면 이전까지의 고고도 폭격으로도 이미 꾸준히 피해를 입었다고 하지만, 또 미국 쪽의 기록에 따르면 수뇌부에서 일본의 전투기 등 병기 생산 능력을 소멸할 것을 폭격 작전 실무자들에게 요구했다고 한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사실 저 밑의 스즈키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하루노보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게 순전히 자기합리화에서 나온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덧붙이면 "옆집 스즈키네"라는 르메이의 발언은 폭격 당시 미군 장성들의 실제 관점과도 일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파괴 전까지 항공기 생산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일본의 항공기 생산 공장들이 더더욱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공식적으로 미국의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당시 국제법상으로도 위법은 아니다. 방어되고 있는 군수공장과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집을 박살내야 하는데 원칙대로라면 군수공장만 노려야겠지만 그런 시설과 노동자 주거지를 민간인 주거지에 혼합해 자국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만들어 버린 일본 때문에 민간인 희생이 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은 민간인을 동원한 인간 방패 전술을 실제로 쓴 적이 있다. 일본군의 민간인을 동원한 인간방패 전술에 대해서는 사이판 전투 문서와 오키나와 전투 문서를 참고하자.

불가피한 작전이었는가?

다만, 이 공습이 실제로 전술적, 전략적으로 불가피한 작전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꼭 필요하지 않은 작전이었다 1 : 카미카제 공격을 차단한 비행장 폭격 커티스 르메이는 당시 일본의 대규모 카미카제 공격을 예측한 니미츠 제독의 요청으로 3월 중순부터 일본군 비행장 폭격을 지휘했는데, 전후 연구에 따르면 이 비행장 폭격 때문에 일본군이 확보했던 항공기에 비해 실제 출격한 항공기의 수가 급감하여 카미카제 작전의 효율까지 덩달아 떨어트린 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되었다.
  • 꼭 필요하지 않은 작전이었다 2 : 더 효과적이었던 해상봉쇄 작전 4월에는 추가로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의 일환으로 폭격기의 일부를 떼서 항만 지역에 기뢰를 살포하는 작전도 진행되었다. 한 달간 기뢰가 약 12,000개가 살포되며 총 배수량 100만 톤에 달하는 일본 수송선단에 피해를 주어 본토로 들어가는 원자재 수송량을 80%나 잘라버렸는데, 물적 피해도 피해지만 연안 해운에 대한 의존이 큰 일본의 국내 교통망도 동시에 마비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폭격기로 도시 하나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린 도쿄 대공습의 화려함에 비하면 수수한 작전이라 가려지긴 했지만 전후 분석 보고서에서는 이 기뢰 살포작전이 일본 본토 공격 도중 가장 효과가 뛰어난 작전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 작전으로 일본 전역에서 민간인 약 30만 명이 아사했다고 추정하는데, 민간인을 직접 죽인 것까지 포함한다면 단일 작전으로 피해를 준 숫자로는 가장 높은 것이다.
  • 결과적으로 더 많은 일본인들을 살린 작전이었다? Warren Kozak,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에서는 도쿄 대공습과 원자폭탄 투하가 일본 전역의 공업기반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굳이 벌일 필요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를 겪어 보니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미군의 사상자를 천문학적으로 늘릴 것이라는 부담을 느껴 도쿄 대공습에 이어 원자폭탄 투하까지 적극적으로 검토했다는 것이다. 이 두 사건이 수십만 명을 죽였지만 결국 수백만 명의 목숨을 살린 비정하지만 현실주의적인 결정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 평가는 도쿄 대공습이 아니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사건과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지상전의 참상을 그나마 겪어본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들을 상대로 겪어 본 관동군 중심의 일본 육군은 소련군이 일본 본토로 넘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항복을 선택했고 그것이 전후 일본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 이러한 논란 자체가 문제이다 위의 여러 주장들을 떠나서, 민간인 지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불가피했다고 평가하는 것 자체에 대한 문제도 있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민간인 살해를 옹호하는 르메이의 어록이 반일, 혐일 감정과 낭만적 군사주의, 현실주의 덕분에 옹호받기는 했지만 사실 그 자체로는 전쟁범죄로 이어질 소지가 큰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적으로 민간인 살상이 전략적 유용성이 있고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공리주의적, 현실적으로 자행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민간인은 기본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존재이며 이 원칙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르메이는 6·25 전쟁 당시에도 저런 관점으로 한반도에서도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으며 이는 당시 미국과 미군의 도덕적 명분을 손상시킨 악수가 되었다. 특히 문제는 정작 북진할 때는 무차별 폭격이 없었는데 북진을 하지 않을 때 발생했다는 것.

일본 문화계에의 영향

도쿄 대공습을 비롯한 일본에서의 폭격, 그리고 나아가 핵무기의 공포는 일본인들의 집단적 기억에 현재까지도 강렬하게 정신적 외상이나 마찬가지로 각인되어 있다. 반전주의적, 그리고 대다수 일본인들이 평화를 염원하며 되새기는 전쟁의 비극 중, 폭격의 기억은 여전히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일본인들의 이 기억은 매우 단편적인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폭격 가치가 없어 미군이 폭격하지 않은 지방 소도시나 시골 사람들은 대도시가 어떻게 구워졌는지도 모른 채 '아니 이렇게 대일본제국이 멀쩡한데 왜 항복하는가'라는 개드립을 쳤을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 인구의 60% 이상이 농민이었고 이촌향도 현상도 일어나기 전이라 결국 현대전의 공포를 제대로 체험해본 일본인은 생각보다 적었다. 심지어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걸 구경하는 일본인도 많았다. 나중에는 제로센 같은 것이 아니라 미군 전투기가 대놓고 본토에 돌아다니는데도 아무 것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또한 독일/이탈리아처럼 국민들이 파시즘을 지지하며 전쟁에 자원한 것도 아니고, 당시 그냥 왕국/제국이었기에 국민들은 국제정세에 대해 아무 정보도 없었다.

일본사에서의 전쟁은 외침이 거의 없었다. 과거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원정과 여말선초의 대마도 정벌도 대마도와 규슈 하카타 일대에만 한정되었다. 지상전의 참화는 보통은 주로 내전으로 겪어왔는데, 너무 오래 전의 역사인데다 그마저도 온갖 무사들의 낭만화된 영웅담으로 점철되어 있다. 임진왜란은 아예 조선반도만 전장이었던데다가 명분도 영 없었고, 실질적으로 아무 성과도 없었던 실패한 전쟁이라 일본인들 다수가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은 대부분 해전이나 공중전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대부분이 육상전인 중일전쟁마저도 중국대륙에서만 진행되었다. 이때문에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일본 본토 폭격을 제하고는 전쟁의 참상을 크게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들이 접한 전쟁에 대한 소식은 남방군도, 중국 등지에서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온 생환병들의 이야기나 옆집에 배달된 전사통지서, 라디오 등에서 흘러나온 대본영의 통제된 정보가 고작이었다. 일본 본토에 살며 달고 유일하게 태평양 전쟁의 참상을 겪은 지역은 그때까지 오키나와 전투 뿐이었다. 무엇보다, 연합군, 특히 미군은 앞서 독일 본토에 진격하다가 거센 저항으로 많은 희생을 겪었다. 오키나와에서만 1만명이 죽게 되었는데, 그나마도 독일의 경우 가장 저항이 거센 베를린은 소련에게 맡김으로써 미국은 그나마 인명피해를 덜었지만, 그래도 서부전선에서 미군이 30만명 가량이 사망했다. 일본도 이렇게 점령하자면 엄청난 피해가 늘어날 수밖에 없어서, 미국은 폭격과 폭탄 투하로 압력을 줘서라도 전쟁을 어떻게든 끝내고 싶어했다. 즉, 일본은 앞서 버티던 독일군이 끼친 미군의 출혈, 오키나와에서 버틴 일본군이 끼친 미군의 출혈 때문에 지상군 상륙이 아닌 폭탄과 폭격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는 세계대전에서 국토가 쑥대밭이 된 유럽, 그리고 이웃나라인 한국에서 만들어내는 전쟁 관련 창작물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한국은 6·25 전쟁 당시 벌어졌던 현대전의 온갖 참상이란 참상은 다 겪어 봤다. 미군이 자행한 폭격 외에도 아군의 어떤 무기로도 파괴하기 어려운 적군 기갑부대의 전격전 침략의 공포, 적군이 근처까지 추격해 왔다는 소식에 혼비백산하는 피난민, 밀고 밀리며 공방이 뒤바뀌던 기동전의 전선, 고지 하나를 두고 벌이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에서 무력하게 죽어나가는 병사들, 반동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북한 공산군과 좌익 자경단에게 민간인 학살과 능욕, 약탈 등 여러 전쟁범죄, 인민재판을 당하는 시민들, 인민의용군이란 이름으로 북한군에게 강제 징발되어야 했던 남한 국민들, 또 반대로 국군이 북진하자 부역자로 몰려 국군과 경찰, 우익 자경단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 이념 대립으로 마을 간에 벌어진 살육전, 밤낮이 바뀔 때마다 주인이 바뀌며 산속에서 진행된 처절한 빨치산 게릴라전, 이산가족의 아픔이나 애환어린 피난 생활, 포로수용소 생활 등 참담한 기억이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이 참상들은 역사와 전쟁을 묘사하는 매체에 그대로 반영되어 관객에게 전쟁의 여러 비극을 각인시킨다. 언급했다시피 유럽에서도 전쟁터가 안 된 지역이 없다시피하고, 나라가 망하게 생겨서 국민들은 전부 끌려나가고, 전쟁을 겪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포탄, 탱크, 전투기, 보병 등의 기억이 한국과 동일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중국에서 만들어내는 전쟁 관련 창작물들도 민족주의적 요소가 들어간 것과 별개로 일단 전쟁의 참상을 다루는 것 자체는 대체로 한국과 비슷한 편이다.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 청일전쟁, 의화단 운동, 신해혁명으로 대표되는 청나라 말기의 전란을 다루는 창작물에서 청나라 관군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도 자신들의 암울한 현실 탓에 끝내 적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중화민국 군벌에 대해 다루는 창작물에서 청말 중화민국 군벌 시대의 붕괴 후 혼란기, 군웅할거, 난세의 혼란을 묘사하며, 중일전쟁을 다루는 창작물에서 일본군전쟁범죄와 일본군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중화민국군(+중국 공산당)의 모습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대장정과 국공내전을 다루는 창작물에서 국민당의 공산주의자 탄압을 세세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생략되는 부분이 어느 정도는 있을지언정 대체로 전쟁의 참상을 세세하게 다루는 편이다.

반면 일본 미디어 등에 등장하는 전쟁의 참상에 대한 이미지는 자신들이 겪은 유일한 현대전의 비극인 '미군의 공습' 위주라는 게 특성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 '불타는 도시', '불타는 도시를 등지고 피난가는 사람들' 또는 '잿더미가 된 도시를 바라보며 분노하는 등장인물'의 묘사이며 지상전의 온갖 참상이나 학살 등 그 외의 현실은 별로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상전에 대한 묘사는 일본 특유의 군사 문화+자신들이 승자였던 중국 전선에서의 경험담이 악영향을 끼쳐 일부에서 전쟁이 미화된 채 결합되어 낭만화되기까지 했다. 유일하게 참혹한 실상을 경험한 태평양 전쟁 참전자들이 남긴 기록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고 심지어 그런 기록도 오노다 히로 같은 인물을 프로파간다로 띄워주면서 사회적 영향력도 크지 못했으며 이를 기록물로 남긴 작가들이 은퇴하거나 세상을 떠난 21세기부터는 좀처럼 다시 조명되지 않는다. 그나마 전쟁의 참상을 세세하게 다루는 작품들도 제2차 세계 대전을 소재로 한 작품들보다는 전근대 일본의 혼란기(특히 헤이안 시대 말기, 센고쿠 시대, 에도 시대 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 및 건담 시리즈 등 미래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더 많다. 이런 점에선 군인들만 죽어나가고 전쟁의 참상을 잘 모르던 1차 세계대전 직후의 독일 제국과 바이마르 공화국과 비슷한 점도 많다. 다만 어찌되었든 도쿄 공습, 원폭 투하는 현대 일본인들에게도 상당한 반전 감정의 발단이 되어 현대도 일본인들은 재무장, 국방비 강화에 대해 국민적 반대가 매우 강한 편이다. 한국이 남녀노소, 좌우 가리지 않고 국방비 강화를 지지하고, 핵무장도 50% 이상의 지지 여론이 있는 것과 크게 대비되는 편이다.